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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42

일본 조선군의 연합군 포로 수용 1941년 말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본격적으로 태평양 전쟁을 막 시작하던 시기, 연합국 측은 국제적십자위원회를 통해서 일본 측에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 속칭 제네바 조약을 상호 준수하자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에 일본은 “조약의 체결국이기는 하지만 비준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속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제네바 조약의 규칙을 준용한다”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폈다. 이런 모호한 포로 협정에 대한 태도는 이후 포로에 대한 강제 노동이나 군속 문제를 야기하는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일본 또한 제네바 협약을 준용한다고 통보한 이상 일본군은 전쟁 전부터 을 내려 포로들을 수용할 준비를 하긴 한다. 문제는 익히 알려진 대로 개전 직후 일본군이 동남아 식민지들에서 집어삼키게 되면서 20만 명이.. 2021. 8. 9.
파월 당시 한국군의 감염병 현황 및 원인 파병 전 사전 교육 등으로 말라리아 등의 현지 풍토병을 예방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통계적으로 볼 때 파월 초기 한국군의 이런 노력은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파병 전 기간 동안 한국군 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총 38,149 명이었다. 이중 17,952명이 풍토병 등 질병 환자였으며, 그 중 말라리아에 의한 환자는 6,499명 이었다. 규모로 볼 때 전체 인원의 절반 가까이는 질병으로 인한 입원(47%)이었으며, 전체 대비 17%은 말라리아에 의한 입원으로 결코 적지 않은 인원들이 질병에 감염되었다. 한국군의 질병 감염은 작전 지역 등 전술적 요소와 기후, 온도, 등 환경 요소, 그리고 개인의 위생 관리 등에 영향을 받았다. 한국군 부대의 전투 작전 횟수가 급증하는 1966년부.. 2021. 7. 30.
파월한국군의 파병 전 감염병 예방 대처 베트남은 열대성 기후로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여 모기가 많은 환경이었다. 이런 베트남의 국토 특성 상 말라리아, 이질 등은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과 달리 심각한 풍토병이었다. 이는 베트남 파병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채명신 장군이 특히 “말라리아는 우리에게 고도의 예방치료 기술을 필요로 하는 생소한 분야였다”고 토로할 정도로 중대한 비전투손실요인 중 하나로 받아 드려졌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파병 전 교육에서 말라리아를 포함한 현지 풍토병에 대한 예비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먼저 한국군은 본격적인 전투병 파병에 앞서 최대한 현지 감염병 정보를 수집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노력은 1964년에 최초로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140명의 인원을 파병하면서 부터 시작하였다. 최초로 파병 된 선발대 였던 이들은.. 2021. 7. 9.
제2차세계대전 미군 공수부대(Airborne Division) 미군 82 공수사단장(82nd Airborne Division) 제임스 마우리스 가빈(James Maurice Gavin) 소장(Major General)(1907년 3월 22일 – 1990년 2월 23일). "낙하하는 짐(Jumpin Jim)"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가빈 소장은 백엽무공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 with Oak Leaf Cluster), 무공훈장(Distinguished Service Medal), 은성무공과 부상(Silver Star and the Purple Heart)훈장 수상자이며, 1945년 3월 21일 몽고메리 원수(Field Marshal Montgomery)로부터 영국 유공지휘관훈장을 수상했다. 바스토뉴를 포위한 독일 5 기갑군의 항복요구에 .. 2021. 6. 10.
제물포 영웅 만들기 2월 9일 발발한 러일 전쟁은 당시 러시아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전쟁이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당시 러시아의 무기 체계는 낡았고 전술은 낙후 되었고 고위 장교들은 불화로 점칠 되어있었다. 사회적으로도 차르 체제의 모순이 심화하던 시기였기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황인종'과의 전쟁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러시아의 패배로 끝나고 이 실패한 전쟁에서 유독 제물포 해전은 러시아인들에게 '영웅적'으로 찬양 되었다. 제물포 해전의 전개 과정은 간단했다. 당시 중립 항구인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장갑 순양함 바랴크 호와 포함 코리예츠 호에 대해 일본 해군은 퇴거를 요청하였고, 이에 결사항전을 벌리기 위해 두 함선은 팔미도에서 치요다를 포함한 일본해군 10척을 맞아 40분 동안 교전.. 2021. 5. 27.
일본의 1차 대전 군사 활동 1914년 7월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미국, 중국과 같이 당초 중립을 선언하여 유럽의 전쟁을 관망하는 모양새를 취하였다. 하지만 유럽 강대국들이 유럽의 전쟁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던 차 때마침 1914년 8월 7일, 영국이 영-일 동맹에 근거하여 일본에 남중국해에서 활동하는 독일의 동양함대 순양함과 상선들을 일본 해군이 단속해 달라는 지원을 요청하였다. 분명 이것은 상선의 보호에 국한한 제한적인 요청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8월 8일 일본 내각은 전면적인 참전을 결의하였다. 이에 영국은 일본의 이권 확대를 우려하여 전면적 참전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내 영국 이권에 위협이 되는 동양 함대는 부담스러웠고 넘어가게 된다. 결국 최후통첩이 독일에 전달되고 8월 23일 일본은 개전.. 2021. 5.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