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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41

일제강점기 한반도 반공체제 형성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시작으로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당연히 중국과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도달하는 등 동북아 지역에 퍼졌다. 사실 1919년 3.1 운동 전후만 하더라도 마르크스-레닌 주의 등의 사회주의 이념들은 별다른 비판 없이 소개되었고 일부에서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이념으로서 민족 해방 운동의 새로운 발로로 평가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20년대를 전후하여 소비에트의 성향이 명확히 되고, 열강과의 긴장이 높아지면서 점차 불온사상으로 간주되었다. 1925년에 일본이 제정한 치안유지법은 최초로 반탈식민지 및 반공 이데올로기를 담은 최초의 입법 활동으로써 법적인 사상 통제를 명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 까지나 법적인 명시일 뿐 1920년대 말까지도 대대적으로 사회에 반공 이데올.. 2022. 3. 23.
19세기 파견 무관의 역할과 영향 19세기는 각국 대사관에 파견 되는 파견 무관의 전성기였다. 당시 각 유럽 열강의 귀족 엘리트 계층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파견 무관은 특유의 귀족 엘리트 주의와 나폴레옹 전쟁의 유산과 결합하여 독특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세기 당시의 파견 무관의 역할 또한 현재의 파견 무관의 역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재국에 상주 하여 평화 시에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면에서는 주재국의 군사적 정보를 수집하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또한 제 3국에서 전쟁이나 군사적 행동이 발생할 경우, 특권적 지위를 부여 받고 이것을 직접 참관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파견 무관은 크림 전쟁 시기에 프랑스에 상주 했던 영국 군인 에드워드 클레어먼트(Edward Stopford Claremont)이나 파견 무관의 등장은 .. 2021. 10. 15.
파키스탄을 무는 개, 탈레반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전략적 종심'은 패배한 군대가 안전하게 들어가 숨을 수 있고 상대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 아니라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아프간과 파키스탄 국경을 걸친 험악한 산악지대는 이런 전략적 환경을 완벽하게 제공할 수 있는 최적의 지형이었다. 파키스탄의 입장에서는 인도의 군사적 해법이 통하기 힘든 지역이었으며, 아프간 탈레반의 입장에선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미군과 나토군의 접근을 제약 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문제는 파키스탄 정부와 군부의 탈레반의 대한 간섭도 공평하게 제약이 걸린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 파키스탄이 카슈미르 문제에 점점 더 집중할 수록 역설적이게도 대아프간 정책과 탈레반에 대한 지원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탈레반은 카슈미르와 파키스탄 전사들에게 아프간 내에 기지를.. 2021. 8. 18.
파키스탄과 카슈미르와 탈레반 파키스탄은 예나 지금이나 탈레반의 든든한 후원자이다. 파키스탄 정보부인 ISI를 중심으로 군부와 민간 정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90년대 경제 위기와 핵실험에 대한 국제 제재 와중에도 탈레반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세력들이었다. 그리고 파키스탄은 탈레반이 97년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잡았을 때 파키스탄이 가지도 있던 두랜드 선을 중심으로한 오래 된 안보 딜레마를 드디어 제거했다고 생각하였다. 파키스탄은 영국이 물러난 이후 태생적으로 두 가지의 안보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하나는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유명한 문제인 카슈미르 분쟁이고 다른 하나는 서북지역의 듀랜드 선을 중심으로 하는 아프간과의 발루치스탄 문제다. 특히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은 이 발루치스탄 문제에 대해서 1950년대와 1960년대 파키스탄.. 2021. 8. 17.
나치 독일과 동독의 프로파간다 아카이브 URL "선전은 나치 독일과 독일 민주 공화국의 중심이었습니다. 독일 선전 기록 보관소에는 선전 자체와 선전가를 안내하기 위해 제작된 자료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목표는 사람들이 기본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여 20세기의 두 가지 거대한 전체주의 체제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 https://research.calvin.edu/german-propaganda-archive/ German Propaganda Archive (Guide Page) 2021. 8. 10.
미군정기 공무원 인사 제도 남한 지역에 들어선 미군정은 조선총독부의 행정기구와 관료를 그대로 이양 받아 군사적 점령 하 에서 편의에 따라 직접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때문에 미군정 초기에는 관료를 포함하여 행정과 사법 부분의 인력을 총독부의 것으로 그대로 이용하였다. 이는 군정 초기인 19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75,000명의 일제 시대 한국인 관리들이 그대로 유임되거나 신규 임용 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미군정의 각종 자문회의 및 중앙, 지방행정 각 부처의 고위직에 한민당계 인사들이 영입되었다. 당시의 미군정의 관료 충원 원칙은 두 가지 성격을 가졌다. 첫번째는 영어 구사력을 포함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것과 동시 미국식 자유주의 이념을 지지하는 친미적 인물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공산주.. 2021.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