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사

파키스탄을 무는 개, 탈레반

by 바스통 2021. 8. 18.
728x90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전략적 종심'은 패배한 군대가 안전하게 들어가 숨을 수 있고 상대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 아니라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아프간과 파키스탄 국경을 걸친 험악한 산악지대는 이런 전략적 환경을 완벽하게 제공할 수 있는 최적의 지형이었다. 파키스탄의 입장에서는 인도의 군사적 해법이 통하기 힘든 지역이었으며, 아프간 탈레반의 입장에선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미군과 나토군의 접근을 제약 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문제는 파키스탄 정부와 군부의 탈레반의 대한 간섭도 공평하게 제약이 걸린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 파키스탄이 카슈미르 문제에 점점 더 집중할 수록 역설적이게도 대아프간 정책과 탈레반에 대한 지원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탈레반은 카슈미르와 파키스탄 전사들에게 아프간 내에 기지를 제공하고 있는 한 파키스탄 정부는 자신들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탈레반은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파키스탄의 다른 요구를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이것은 시간이 갈 수록 파키스탄을 더욱 정치적 및 전략적 파탄 상태로 몰아넣었다.

 

 일찍이 파키스탄 정부와 군부는 탈레반을 통해 역대 아프간 정권이 절대 인정하지 않는 듀랜드 선을 탈레반이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지원한 탈레반은 파키스탄 서북지역의 파슈툰 민족주의를 억제하고, 파키스탄 내의 급진 이슬람 세력에게 출구를 제공해 카슈미르를 포함한 외부 활동을 증가 시키고 내부 운동을 억제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당연히 탈레반은 듀랜드 선과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2020년대인 현재에도 그 입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또한 이슬람의 성격을 가지긴 하였지만 파슈툰 민족주의를 지원하고, 파키스탄 파슈튠족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파키스탄 파슌튠족들 중에는 탈레반을 모방하는 부족그룹이 생겼으며 실제로 이들은 90년대에 파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봉기하였다가 파키스탄 군에게 진압되기도 하였다. 

 

 더 큰 문제는 파키스탄 군부와 정부의 '탈레반화'를 가속 시킨다는데 있다. 1990년대 아프간에 첫번째로 탈레반 정권을 세웠을 때, 탈레반은 파키스탄에서 가장 폭력적인 수니파 무장 그룹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고 무장시켰으며, 파키스탄을 수니파 국가로 선언하였다. 종래에는 파키스탄에 이슬람 혁명을 통해 세속주의 지도층 엘리트들을 일소하고 이슬람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다. 이런 불안은 종래에 2004년 테러와의 전쟁을 기점으로 결국 서북 파키스탄 전쟁과 와지리스탄 탈레반의 준동으로 표출되게 된다.

 

 파키스탄 사회 각층과 주요 인사들은 특히 군부와 정보부 내의 파슈튠족 인사들이 '탈레반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여기에 경직된 사회 분위기와 조직 위계질서는 현재의 정책과 사상적 급진성에 대한 비판을 원천 봉쇄하고 탈레반에 사상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하였다. 여기에 더해 사회 각층에 침투한 사상적 동조자들과 현지 마피아를 포함한 이해관계자들은 파키스탄 정부에 대한 강력한 로비 그룹을 형성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97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 정권을 수립된 후, 탈레반에 대한 지원으로 파키스탄 정부가 이 지역을 불안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난을 받는 등 주변국과의 외교 환경이 악화되고 있음에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런 반동으로 인해 파키스탄과 탈레반에 대한 국외의 비판이 더욱 고조되자 더더욱 맹목적으로 탈레반을 옹호하였다. 심지어 1998년 당시에 파키스탄 UN 대사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고립된 것은 파키스탄이 아니라, 세계 다른 나라들이 파키스탄으로 부터 고립된 것이며, 이들은 탈레반에 대한 파키스탄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등 심각하게 현실을 왜곡된 발언한다. 이런 고립 된 파키스탄의 입장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파키스탄에 크게 의존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 일소 된다. 2000년대 후반이 되면 파키스탄은 '북서 파키스탄 전쟁'과 이슬람 극단주의  미국에 여러 군사 원조를 요구할 수준으로 상하 관계가 미묘하게 뒤바뀌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탈레반화' 문제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가 국제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을 옹호하는 동안, 파키스탄은 그로 인한 손실을 크게 입었다. 특히 밀무역으로 인한 손실은 실로 막심해서 가장 심할 때에는 파키스탄의 국고의 30%를 증발 시키기도 하였다. 이 밀무역 루트는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해 서쪽에는 투르크메니스탄을 거쳐 중앙아시아국가들과 러시아로 뻗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이란과 파키스탄의 카라치항을 걸친 거대한 루트다. 이 곳을 통해 현지 마피아들은 각국의 부패한 국경 관리들과 협작하여 각종 공산품과 사치품 그리고 헤로인과 아편과 같은 마약을 밀 거래하였는데, 탈레반은 아프간을 중심으로 이들의 밀무역 루트를 지켜주는 대가로 상당량의 통행세를 받아 수입을 얻는다. 때문에 아프간에 탈레반의 세력이 확장될 수록 밀무역의 크기는 더욱 커져갔으며 파키스탄의 국가 재정은 이에 반비례해 파탄 상황에 이르게 되는 악순환이 발생하였다. 또한 이 밀무역 루트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방 관리들과 지역 정치인들은 상당수의 뇌물을 받거나 탈레반과의 공생관계가 되어 파키스탄 정치에 탈레반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냈다.  

 

 이 국경 밀무역 루트는 탈레반과 마피아가 아프가니스탄의 자원을 약탈하는데도 사용되었다. 아프간에 있는 목재나 고철 자원들을 파키스탄 암시장으로 가져와 팔거나, 파키스탄에 있던 자동차들 훔쳐 아프간으로 가져가 번호판을 바꾸어 달고 파키스탄에 되파는 방식이 성행하였다. 이 덕분에 파키스탄의 암시장은 1997년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 이후 더욱더 커졌으며, 1996년에는 파키스탄 GDP에 51%를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이런 파키스탄 밀무역과 암시장의 성장은 싼 값에 면세 소비재들을 유통 시켜 파키스탄에 자생하고 있던 제조업들을 고사 시키는 결과로도 이어지게 된다. 

 

 1990년대 파키스탄 정부는 마지못해 상황을 규제하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항상 탈레반은 그런 금지 조처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마피아가 정부 각료들에게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파키스탄 정부의 조치들은 실패했다. 하지만 사실 탈레반에게 법을 지키라거나 이건 잘못 되었다고 지적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좀 더 실체적인 진실이지 않을까 싶다. 이를 폴케네디는 "아프간 내전의 개입 결과로 파키스탄의 사회는 이제 정교한 무기의 범람으로 더욱 분열되고, 민간인들의 폭력으로 잔인해졌으며, 마약이 확산되고 범람하게 되었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탈레반 집권기가 파키스탄에게 남긴 것은 정부 기구와 제도의 불능화 그리고 경제적 파탄과 서방국가와 인접 국가들로부터의 고립이었다. 이런 공백 상태를 이슬람 투사들이 비집고 들어와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만 고조시켰다.  실패 국가 파키스탄은 이렇게 만들어지게 된다. 이를 파키스탄 정부는 미국의 아프간 전쟁이라는 천운으로 받은 군사적 경제적 원조로 버텼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고 탈레반이 재집권한 지금 현재 파키스탄 정부는 일단 두 팔 벌려 지금 상황을 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한번 문 개가 두 번 물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지 모르겠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