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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2

독립 운동 선전 잡지를 통해 보는 국제 정세 인식 1940년 9월은 일본이 추축국에 가입하는 반공협정을 맺은 달이면서 한국사적 의미에서 충칭의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한 날이기도 하다. 날로 중일 전쟁이 격화되는 1940년과 1941년 당시 독립 운동은 크게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외교적 활동을 통해 독립을 승인 받는 '외교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에서 한인 군대를 양성해 일본에 직접 군사적 작전을 벌리는 이른바 '군사운동'이다. 오랜 시간 동안 치열하게 갈등을 부르던 이 양 노선 문제는 충칭에서 광복군이 창설 됨으로써 군사운동은 광복군에 외교운동은 임시 정부가 맡는 양립체계를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익히 알려진대로 광복군의 군사 활동은 국민당 정부의 간섭과 소극적 태도로 상당기간 동안 순조롭지 못했다. 또 많아봐야.. 2020. 7. 20.
미주 한인들의 대일 공작 시도 미국은 임시 정부에 대한 불승인 정책을 고수하면서도 대일 전쟁에 한인 무장 조직을 활용하는 문제에 대하여 전쟁 초기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미 군부와 정보 기관에서는 국외 한인들을 이용한 소규모의 첩보 및 침투 공작에서부터 한반도 내 무장 봉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능성에 대하여 폭넓게 검토하였다. 이 문제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은 정보조정국(Coordinator of Information: COI)이었다. 도노반(William J. Donovan)을 책임자로 한 COI는 1941년 11월 중국 상하이를 거점으로 한 비밀 첩보 기관의 설치 방안을 검토하였다.註 109 그런데 같은 해 말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1942년 1월 들어 COI는 한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2020.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