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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독립 운동 선전 잡지를 통해 보는 국제 정세 인식

by 바스통 202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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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은 일본이 추축국에 가입하는 반공협정을 맺은 달이면서 한국사적 의미에서 충칭의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한 날이기도 하다. 날로 중일 전쟁이 격화되는 1940년과 1941년 당시 독립 운동은 크게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외교적 활동을 통해 독립을 승인 받는 '외교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에서 한인 군대를 양성해 일본에 직접 군사적 작전을 벌리는 이른바 '군사운동'이다. 오랜 시간 동안 치열하게 갈등을 부르던 이 양 노선 문제는 충칭에서 광복군이 창설 됨으로써 군사운동은 광복군에 외교운동은 임시 정부가 맡는 양립체계를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익히 알려진대로 광복군의 군사 활동은 국민당 정부의 간섭과 소극적 태도로 상당기간 동안 순조롭지 못했다. 또 많아봐야 500명 내외에 그치는 소규모 조직에 불과했다. 그러나 광복군은 적극적인 후방에 대한 선전 공작과 정보수집으로 성과를 내었다. 본 글에서는 당시 선전을 위해 발행되었던 <한국청년>과 <광복>을 통해서 당시 임시 정부와 상해의 한인들이 당시의 국제정세를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기술하고자 한다.

 

광복군 선전 잡지

 

 앞서 선술한대로 광복군의 기본적인 활동은 일본군과 후방에 대한 선전 공작이었다. 이를 위해 당시 주요 선전매체로 잡지가 활용되었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1의 선전잡지 <한국청년>과 한국광복군이 발행했던 <광복>은 당시 한국 광복군과 한인 무장 조직의 활동상 특히나 선전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실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이다.2

 

 <한국 청년>은 광복군이 창설되기 두 달 전인 1940년 7월 서안에서 중국어로 창간되었다. 이후 1941년 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 광복군에 흡수되어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자 <한국청년>은 5지대의 기관 잡지가 되었다. 주 내용은 전지공작대의 활동 내역을 소개하는 것이었지만 전시 일본의 상황이나 국제 정세에 대한 내용이 실렸으며 항일 문학 작품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광복>의 경우 1941년 2월 서안에서 광복군의 기관지로 창간되었다. 1942년 1월까지 월간 혹은 격월로 총 7차례 발행되었다. <광복> 경우는 주로 일본과 유럽의 전황 등 전시 국제 관계와 정세에 대한 전망과 한국 독립 운동의 진로와 전략에 대해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광복군 정훈처 선전국 소속의 한인들이 집필하였다.

 

   두 잡지는 모두 항일 투쟁을 고취 시킬 목적으로 발행 되었으며 때문에 공통적으로 국제 정세에 대한 전망과 분석이 중점적으로 다뤄졌다. 이는 임정이 당초 견지하고 있던 독립 투쟁 노선인 무력 투쟁과 함께 외교 운동을 병행하려 노력하였음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광복군의 군사활동과 수록하여 임정의 입지를 선전하려 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한국청년>과 <광복>에 나타난 미일소영을 중심으로한 국제 인식

 

 광복군이 창설된 1941년은 일본이 추축국에 가담하여 중국 침략과 동시에 동남아로 군세를 확장할 것이냐는 것이 주요 문제였다. 때문에 <한국청년>과 <광복>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편의 글을 수록하여 다루고 있다. 주로 "적정연구" 등의 이름으로 일본의 상황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전략의 향배를 가늠하려는 노력하였다. 이들 글에서 일본의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은 중일 전쟁 개시 이후 일본은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고 있고, 국제적으로도 고립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테면 일본이 39년을 기점으로 경제가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는 이유를 분석하며 이를 심각한 자원 결핍에서 찾고 있다. 특히나 군수 산업에서 핵심 자원인 동, 철강, 석유의 부족이 심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본의 전비는 확대 일로에 치닺고 있으며 전체 재정에서 전비가 71%나 달하는 점을 꼬집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대규모 증세와 무차별적인 국채 발행을 벌리고 있으며 급격한 통화 팽창으로 인한 엄청난 인플레에 당시 일본이 직면하였다고 진단하였다. 이런 현상은 일본, 대만, 조선 등지에서 발생하는 쌀 부족 사태로 그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였다.

 

 때문에 이들 잡지의 집필진들은 이런 일본의 심각한 재정 파탄과 민생 파탄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자원 수급지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자원 수급지가 동남아일 것이라고 보았다. 특히나 일본에게 있어서 주요 군사 물자가 생산되고 쌀 생산지기도 한 동남아는 일본에게 매력적인 지역이며 미국의 경제재제로 인해서 더욱 동남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점을 들어 일본의 동남아 침공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일본의 동남아 개전 시기에 대해서는 일본이 추축국이 유럽에서 완전히 승리하기 전까진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을거라고 예측하여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일본 남진 주장에 대해서 적극적인 관심을 표했던 이유는 일본의 남진이 필연적으로 미국과 영국등 서방국가들을 자극할 것이라는 일종의 희망과 기대가 섞여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일 전쟁 발발 직후부터 중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서구국가들의 지원을 희망이 널리 퍼져있었다. 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와 대전의 발발 등으로 서구의 반응은 미지끈하였으며 미국 또한 본격적으로 일본에 대한 제재에 나서지 않는 것 같자 중국인들의 기대는 크게 꺾여가고 있는 시점이 1941년 7월을 전후한 상황이었다. 

  

 이런 당시 중국인들의 침체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청년>과 <광복>에서는 적극적으로 미국의 참전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물론 미국의 참전 가능성 언급이라는 것이 당장의 개전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입장이었지만, 필연적으로는 미일 간의 전쟁이 일어난다는 분명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또 전쟁 발발시에 단기적으로 일본이 유리할지도 모르나 끝내 미국이 승리할 것이라는 전망도 게재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로 미국의 군비 확장과 일본의 대미무역 의존도 그리고 일본의 국내외적 교착 상황등을 들었다.

 

 동시에 본 잡지에서는 미소 협력에 따른 소련의 대일 참전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무적인 입장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의 중국 주권 영토 보존 및 문호 개방 정책과 소련의 중국에 대한 이권 포기 선언등이 동일 선상에 있다고 보았으며 일본이 동남아로 진출하게 된다면 미소 간의 대일 인식과 이해관계는 같아질 것이라고 예상하였던 것이다. 이는 당시 소련이 미국과의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으며 독일과의 상호 불가침 조약을 통해 서방세력과의 노선에서 얼마던지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결과였다. 당연하지만 일소 중립조약으로 이 예측은 철저하게 분쇄되었다. 

 

 한편 영국의 대일전에 대해서도 영국과 미국의 관계 그리고 남양과 인도 미얀마에 대한 영국의 이해 관계를 볼때 대일 참전이 필연적일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하지만 남양과 인도양에 있는 영국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면서 특히나 해당 지역 영국 해군 전력을 일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고 평가하였다.(물론 전 세계가 당시에 그렇게 생각하였다)

 

 사실 이런 국제 인식은 당시 중국인들의 인식과 큰 차이점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나 <광복>이나 <한국청년>에 기제된 기사의 원천들이 대부분 중국의 자료나 일간지, 잡지 등에서 추출되었다는 점에서 볼때 중국인들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를 테면 일본이 동남아 태평양 지역으로 전쟁을 확대할 것이고 영미와 충돌할 것이라는 인식은 1937년 말부터 꾸준하게 거론된 것이었다. 또 일본의 대동아 공영 정책과 영미의 동아시아 이익이 필연적으로 충돌할 것이라는 예측 또한 널리 퍼져있었다. 심지어는 1941년 말에 미국이 일본과 본격적인 전쟁 상태에 들어간다3는 대담한 회자되던 시기였다. 이런 관측들로 미뤄볼때 한국 임정과 광복군 측이 상술한 국제 인식은 이에 아류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대한 구체성이나 사실성 여부와는 상관 없이 이들 잡지가 말하는 가장 중심적인 논지는 한국의 광복이고 여기에 모든 것을 집중하였다는 점은 중국인들의 인식과는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이를 테면 한국의 독립에 유리한 정세를 그리면서 그 것을 바탕으로 국제 정세를 풀어내고 있다고 하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물론 이런 정세 판단때문에 객관적인 판단에 의한다기 보다는 국제 관계 변화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더 투영한다는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국제 정세의 변화가 장차 임정과 한국 광복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이를 기반으로 임정과 광복군이 보다 주도적인 입장이 되어 장차 한국 광복이 이루는데 일보 할 것이라는 신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출처: <한국광복군>

      <대한민국 임시정부자료집 14권 15권>

      <한국광복군연구>

     <조선 의용대, 조선의용군>

     <이청천과 한국광복군>

     <1941년의 '꿈' -한국광복군의 국제정세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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