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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미주 한인들의 대일 공작 시도

by 바스통 202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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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임시 정부에 대한 불승인 정책을 고수하면서도 대일 전쟁에 한인 무장 조직을 활용하는 문제에 대하여 전쟁 초기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미 군부와 정보 기관에서는 국외 한인들을 이용한 소규모의 첩보 및 침투 공작에서부터 한반도 내 무장 봉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능성에 대하여 폭넓게 검토하였다. 이 문제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은 정보조정국(Coordinator of Information: COI)이었다. 도노반(William J. Donovan)을 책임자로 한 COI는 1941년 11월 중국 상하이를 거점으로 한 비밀 첩보 기관의 설치 방안을 검토하였다.註 109 그런데 같은 해 말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1942년 1월 들어 COI는 한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검토하기 시작하였으며, 1월 27일 올리비아(Olivia)라는 이름이 붙여진 작전 계획이 도노반에게 제출되었다.註 110 그런데 COI는 1942년 6월 13일 합동 참모부 산하의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으로 재조직되었는데, 이때 이승만은 OSS의 유력 인물과 친분이 있었다.註 111 그가 바로 육군부 정보참모부 소속으로 COI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던 굿펠로우(Preston M. Goodfellow)였다. 그는 1942년 8월에 대령으로 승진하면서 OSS의 부국장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 초기부터 이승만의 복안은 미국 내 한인들을 비밀리에 모집하여 특수 훈련을 시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1942년 7월 28일 이승만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부위원장 김병연에게 한인 적임자를 물색하여 지원서를 작성케 한 후 워싱턴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0월경 이승만은 50명의 명단을 OSS에 통보하였다.註 112 이 계획은 ‘FE-6 프로젝트(Project)’라고 불렸는데, 1942년 10월 10일자로 이승만의 제안서인 한인 ‘군사적 자원(Military Resources)’과 ‘게릴라 훈련’ 참여를 요청한 50명의 신청서가 굿펠로우에게 제출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1942년 11월 17일 OSS 극동과 책임자인 찰스 레머(Charles Remer)의 승인을 받아 이승만이 승인한 한인 24명의 명단을 OSS 특별 작전과(Special Operation Branch)로 발송되었다. 프랜시스 데블린(Francis T. Devlin) 대위는 이들 가운데서 다시 12명을 선별하였는데, 이들이 ‘코리안 프로젝트(Korean Project)의 핵’으로서 특수 작전 훈련을 받은 후 충칭 지역으로 배치하기로 되어 있었다.註 113

 

 이 계획은 미국과 한국 간의 역사적인 첫 군사 협력 활동이었다. 선발된 12명이 워싱턴으로 차출되어 12월 4일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이승만과 OSS가 추진한 첫 사업의 성과가 어떠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승만이 밝힌 바에 따르면 최종 선발된 12명 가운데 9명이 소정의 훈련 과정을 이수하였고, 1943년 4월 15일 시설 부족을 이유로 해외로 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만이 시민의 신분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8명은 육군에 등록하였다. 그들은 워싱턴 근교의 캠프에 머물면서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당초 계획한 특수 임무는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註 114 

 

 미국도 당면한 전시의 필요성과 대일전 수행을 위해 재미 한인 활용 방안을 모색하였고, 또 한인 사회와 한인 정치 세력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註 115 이를 토대로 미국의 3부조정위원회(SWNCC) 국무부 대표는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군의 조직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註 116 미국 군부에서도 한인들을 대일 전쟁에 동원하는 문제를 다각도로 검토하였다. 1943년 들어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미국에게 유리해지자 1944년 후반 한인들을 이용한 직접 행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45년 전반 OSS는 해외 한인 사회의 분포 양상, 각각의 사회·정치적 조건, 활동성 등을 토대로 한인을 이용할 수 있는 공작 분야를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註 117 

 

 한편,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면서 남태평양 지역에 있던 한인들이 미군에게 전쟁 포로로 잡혀 미 본토 및 하와이로 들어왔다. 하와이 포로수용소의 경우 통역을 맡은 한인 2세들과 한인 목사들이 한인 전쟁 포로의 실체를 외부에 알렸다.註 118 1943년 12월경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도 이에 대한 정보를 갖고 전경무는 직접 호놀룰루로 가서 확인하였는데, 한인 전쟁 포로들이 일본군 군인·군속 출신의 청년들이라는 사실에 자못 놀랐다.註 119 또한 맥코이 수용소에도 미군이 사이판 등의 섬을 점령할 때 포로가 된 한인 110명가량이 수용되어 있었다.註 120 

 

 이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한인 포로들을 활용할 방법을 미국 당국과 협의하였다. 전경무는 1944년 2월 길버트·마샬 군도에서 미군 포로가 된 한인들이 하와이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하와이 군정(Office of the Military Governor of Hawaii) 당국과 구체적으로 협의하였다.註 121 그는 군정 당국에 대해 “한국인들이 일본 정부에 전혀 동조하지 않고 한인으로서 충성심을 증명할 수 있도록 신중히 고려해 줄 것과 그 사람들이 태평양 전역에서 연합군의 병력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의지와 희망에 따라 일종의 군사 작전에 참여하게 해 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그는 미국 국방부 보좌관 맥클로이(McCloy)에게 「미군 수용소에 있는 한국인과 그들의 노동력 이용」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한인 전쟁 포로를 이용하자고 제안하였다.註 122 

 

 1944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미국 당국도 재미 한인들과 한인 포로를 전쟁에 동원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연합국의 점령지가 확대될수록 한인 포로의 숫자가 늘어감에 따라 조기에 훈련되고 조직화된 한인 포로들을 이용하여 대일 전쟁을 원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하와이에 있는 한인들이 전쟁 포로 신분이라는 것이었다. 전쟁 포로의 이용은 현실적으로 제네바 협정(Geneva Convention)과 헤이그 협정(Hague Convention)과 같은 국제 조약을 위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국제 규약 때문에 한인 포로들이 직접적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기는 힘들었다. 

 

 미 국방부에서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제안에 대해 “미국과 일본 간의 협약에 근거하여 일본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통보하였다.註 123 그리고 1945년 1월 미 국방부에서도 한인 포로의 활용에 대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였으나 전투에 복무시킬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註 124 이에 따라 하와이 한인 전쟁 포로들이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과 대항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한편, 이승만도 1944년 7월 18일 다시 합동 참모 본부에 편지를 써서 태평양 근역 섬에서 포로가 된 한인 노무자나 군인들을 훈련하여 일본과 한국 침투 공작에 사용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주미외교위원부가 포로 중에서 적당한 인원을 선별하겠다고 나섰다.註 125 이에 대하여 OSS에서는 이승만을 통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고 OSS가 직접 중국에서 한인들을 훈련할 계획이라고 내부 문서를 돌렸다. 미국은 이승만과 한길수 계열이 아닌 재미 한인을 이용하여 한국 내에 침투시키려는 냅코 작전(Napko Project)을 계획한 것이다.註 126 

 

 미국 당국이 1944년 후반부터 한인들을 이용한 직접 행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냅코 작전은 1944년 하반기에 확정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민족혁명당 미주 총지부의 진보적 인사들도 무장 부대를 통한 좀 더 적극적인 항일 투쟁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래서 1945년 1월 4일 변준호·김강은 OSS의 민간인 요원으로 참가하였고, 이경선·이창희는 OSS 요원으로 미군에 입대하였으며, 황사용·최봉윤·신두식 등은 샌프란시스코의 전시 정보 기관의 미국 선전 방송 등에 관계하게 되었다.註 127 특히 한인들 가운데 미국의 정보 기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미 국방부는 일본어에 능통한 한인들을 다수 채용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통역으로 배치되었다. 이때 채용된 인물로 이정근(李正根), 박용학(朴容學), 노아 조(趙光元) 신부 등이 있다.註 128 나성한인감리교회의 이진묵 목사는 1944년 샌프란시스코의 전시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에서 황성수, 김태묵, 이동진(Samuel Lee) 등과 함께 단파 일본어 방송으로 미국이 일본과 벌인 심리전에 가담하였으며,註 129 여성으로는 박마타도 샌프란시스코 정보국에서 근무하였다.註 130 일본인이 수용소에 갇히면서 번역하는 사람이 많이 필요해서 장기형과 선우학원은 함께 FBI에서 일본어 번역 일을 하였다.註 131 

 

 또한 냅코 작전에는 맥코이 수용소의 전쟁 포로와 버마 전선에서 투항한 학병 출신자도 참가하였다. 특히 일본군 출신의 한국인 군인·군속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사람들이 많아서 반일 증오 감정이 극단적이었다. 이들은 남가주의 산타 카탈리나(Santa Catalina)라는 큰 섬에서 훈련을 받았다. 공작 교육생들은 무기, 비무장 전투법, 지도 읽기, 파괴, 무전, 촬영, 낙하산 훈련, 비밀 먹 사용법 등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 대일 전선에 투입되기를 기다렸다.註 132 하지만 일제가 패전하는 바람에 이들이 실질적으로 전시 공작에 참여할 기회는 제공되지 못하였다.

 

 

 

 

 

註 109 : 고정휴, 2004, 「태평양 전쟁기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 442쪽 

註 110 : 고정휴, 위의 논문, 443쪽 

註 111 : 고정휴, 위의 논문, 444쪽 

註 112 : 고정휴, 위의 논문, 446쪽 

註 113 : Robert Fahs 저·반병률 역, 2005, “American Intelligence on Koreans in the United States, 1941∼1945,” 국가보훈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재미 한인 자료』, 28쪽

 註 114 : 고정휴, 2004, 「태평양 전쟁기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 446쪽 

註 115 : 정용욱, 2003,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 정책』, 서울대학교 출판부, 63쪽 

註 116 : 『미국의 대한 정책 1834·1950』, 91쪽.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일본이 위임 통치를 받고 있는 섬에서 체포된 한국인 전쟁 포로 및 민간인 억류자들 가운데 자원자로 한국군을 구성하여 태평양에서 한국의 깃발 아래 전투 임무를 수행하고, 해방 후에는 한국에서 군사 정부가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군대는 미 육군 소속의 한국계 미국인 장교에 의해 지휘를 받으며, 미국 현지 사령관의 포괄적인 명령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註 117 : 정용욱, 앞의 책, 86쪽 

註 118 : 하와이 한인 전쟁 포로에 대해서는 김도형, 2004, 「태평양 전쟁기 하와이 포로수용소의 한인 전쟁 포로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참조 

註 119 : 피터 현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는데, 그는 미군에 입대하여 군사 언어 학교를 졸업하고, 맥코이 수용소에 배치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놀란 것은 포로들이 일본인 아닌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한인 포로는 거의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왔다는 것과 재미 한인 병사가 그들을 돌본다는 것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하고 있다(Hyun, Peter, ibid., p. 198). 註 120 : 『신한민보』 1944년 12월 28일자, 「한인 전쟁 포로들을 위문코저 경애하는 동포들게 고함」; 『신한민보』 1945년 1월 18일자, 「한인 포로자를 위문 지싱 지방회」 

註 121 : 「전경무(J. K. Dunn)가 맥클로이(McCloy)에게 보낸 편지(1944. 6. 5)」(독립기념관소장, 도산자료 A01402) 

註 122 : 「전경무(J. K. Dunn)가 맥클로이(McCloy)에게 보낸 편지(1944. 6. 5)」(독립기념관소장, 도산자료 A01402) 

註 123 : 「전경무가 한시대에게 보낸 편지(1944. 8. 29)」(독립기념관소장, 도산자료 A00931) 

註 124 : 「John Weckerling이 전경무에게 보낸 편지(1945. 1. 8)」(도산자료 A01017); 「전경무가 국방부 웨컬링(Weckerling) 장군에게 보낸 편지(1945. 1. 25)」(도산자료 A01016) 

註 125 : 방선주, 1997, 「미주 지역에서 한국 독립 운동의 특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505쪽 

註 126 : 냅코작전에 대해서는 정병준, 2001, 「NAPKO PROJECT OF OSS 해제」, 『NAPKO PROJECT OF OSS』, 국가보훈처 참조 

註 127 : 최기영, 2004, 「1930∼40년대 미주 기독교인의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이경선(李慶善)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20, 50쪽 

註 128 : 이원순, 앞의 책, 1989, 251쪽 

註 129 : 김신행, 2004,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LA 연합 감리교회의 100년 역사』, LA연합감리교회, 198쪽 

註 130 : 『신한민보』 1945년 1월 25일자, 「박마타 여사 정보국 취직」 

註 131 : 김신행, 앞의 책, 198∼199쪽 

註 132 : 방선주, 1997, 앞의 논문, 507쪽

 

 

출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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