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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하와이 한인과 2차세계대전과 전시통제

by 바스통 202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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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모든 한인들은 해방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드디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서 힘을 쏟기 시작했고 이제 누가 승리하게 될 것인가는 분명했다. 하와이의 한인들은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한 것을 환영하고 1920년대 이후 부진했던 독립운동도 즉시 재개하게 되었다. 한인 사회는 힘을 합쳐서 과거에 그들이 보여주었던 분열상을 극복하고 미국 정부와 공동전선을 펼 수 있도록 강력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중심 세력이, 외부적으로는 계엄령의 제약들이 하와이에 있는 한인 사회를 파열시켰다. 이 장에서 언급하는 연구의 자료들은 맥밀란(Michael MacMillan)의 훌륭한 연구와 미국 정부기관이 한인 사회에 관하여 수집한 비밀 정보에 기초한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해 한인들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하와이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거의 같은 반응을 보였다. 예를 들면 어느 한인 가족은 그 공격에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나는 어머니가 교회에 가야 한다고 나를 깨우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나에게 파파야를 따서 아침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내가 차고의 지붕 위에 올라가 노랗게 익은 과일을 따려고 하자 비행기들은 나를 향하여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닭장에서 계란을 가지고 나오고 있었다. 총알이 어머니의 발 앞에 떨어졌고 어머니는 주먹을 흔들면서 뭐라고 소리치셨다. 비행기의 폭음 때문에 나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휠러 공군기지에서 연기가 치솟아 유칼리나무 숲을 휩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카메하메아(Kamehameha)의 킹(King) 고속도로에 기총소사를 퍼부어 내가 서 있던 길 건너의 집 유리창을 박살냈다."

 같은 날 또 다른 한인 가정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18세의 영만오빠는 하와이 대학 ROTC의 일원이었는데, 병기고 앞으로 집합하라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나갔다. 내 동생 영철은 하와이가 공격을 받은 그날 15세 보이스카웃 11대대에 소집되어 '훈련된 들것 운반자'로서 로열 하와이안 호텔(Royal Hawaiian Hotel)로 떠났다. 아버지는 트럭 운전사로 자원하셨는데 회사 트럭을 가지고 이올라니 궁(Iolani Palace)에 설치된 민방위 사령부로 가서 육군에서 내려올 명령을 기다렸다. 수십 명의 한인 남자들도 그들의 트럭과 모포를 가지고 와서 근무수행을 위하여 여러 날 밤을 대기했다." 곧 하와이의 한인들은 '조선은 미국의 승리를 위해서 싸운다'라는 글을 쓴 동그란 배지를 팔기 시작했다.

 일본의 공격으로 미국 군대가 하와이를 통치하게 되었다. 하와이에 있는 많은 일본인들이 간첩 행위와 파괴행위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주지사 포인덱스터(Joseph B. Poindexter)의 양해하에 하와이의 미군 사령관인 쇼트(Walter C. Short) 중장이 1941년 12월 7일 오후 계엄령을 발동하고 하와이 영내의 모든 민간 업무, 즉 입법·사법·행정을 관장했다. 쇼트 중장과 그의 후임자들은 '군정장관'이라는 이름으로 1944년 가을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통치했다. 계엄령은 통행금지, 등화관제, 배급, 언론 검열, 직장 통제 등을 의미했다. 계엄령은 또한 적국(일본인) 국민들에 대한 제약을 가했는데 한인들은 즉시 자신들의 지위에 대하여 문의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군법무관에게 이첩되었는데 그는 이민국(Immigration & Naturalization Services)과 협의하여 하와이의 한인 1세들은 일본의 신민들이며 따라서 적국의 국민으로 분류된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으로 대한독립운동이 다시 부활되어 하와이의 한인들은 '적국 국민'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하여 노력했다.

 분명히 하와이의 한인들은 일본인과 같이 불편한 상태에 있지는 않았다. 진주만 공격 후 몇 개월 이내에 미국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약 2,000명 이상의 일본인들이 하와이나 본토에 있는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한인들을 일본인처럼 잡아들이지는 않았지만 한인 1세대는 일본 국민이라고 생각되었고 그래서 그들도 여러 가지 제약을 받게 되었다. 몇몇 제약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가해졌다. 1941년 여름 일본인의 재산(한인 1세들의 재산도 포함)이 미국 대통령의 명령에 의하여 동결되었다. 12월 7일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인과 한인들은 허가된 '정상적인' 상행위 외에 부동산의 매매 혹은 이전, 증권·자본의 거래를 할 수 없었다. '비정상적인' 재산의 증식·지불·이전, 혹은 은행으로부터 허가되지 않은 금액 인출, 어떤 사람이나 기관의 재정을 위험하게 하는 어떤 거래도 할 수 없었다. 또 다른 법규로, 한 달에 생활비로 200달러 이상을 은행에서 인출하지 못하게 했으며, 따라서 일주일에 50달러 이상 인출할 수 없었다. 적국 국민들에 대한 200달러 이상의 월급이나 임금은 은행에 예치되어 동결되었다.

 다른 제약은 일본인과 한인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제약들은 쌍안경, 무기나 화약, 폭탄, 단파 라디오, 암호와 암호 해독기, 카메라,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쓰는 문서나 책, 군사 시설과 장비의 그림이나 사진 등의 소지나 작동을 금지시켰다. 또한 정부나 정부 정책, 정부 직원들에 대하여 위협을 주거나, 공격하기 위한 인쇄물, 글 등을 금지했다. 만약에 민간인이 여행을 하거나 직장을 바꾸거나 비행기를 타려면 사전에 군사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했다. 외국 시민들은 1940년에 통과된 거류외국인 등록법에 따라 그들에게 발급된 신분증을 항상 가지고 다녀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낮에는 특별한 허가 없이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으나, 적국 거류민들은 일반인들보다 제약이 더 심해서 일반 미국 시민들과 달리 통행 금지 전에 있었던 등화관제 시간에도 거리를 다닐 수가 없었다.

 일본을 적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한인 1세대는 진주만 공격 후 형성된 보안 조치에 자신들이 옭아 매이게 될 줄은 거의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이 더욱 화가 난 것은 자신들이 보통 미국인들보다도 일본을 더 반대해왔고 여전히 반대하고 있는데도 적국인 일본인들과 같은 대우를 받은 탓이었다. 전쟁 후 1년 동안 한인들을 조사한 어느 연구자는 나이 많은 한인 1세들은 거류 일본인과 미국 시민 일본인들에게 적대적이고 불신하는 태도를 일관성 있게 유지해왔다고 말하고 있다. 한인들이 자신들을 '적국의 거류민'으로 간주하는 제약에 대하여 다같이 분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전쟁 동안의 한인 사회를 깊이 조사해보면 한인 사회 전체가 통합되어 있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과거 하와이에서 있었던 독립운동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한인 사회에 계속 불화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한인 사회가 그들간의 불화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태평양전쟁이 확대되자 1920년대 이후 무력해지고 분열되었던 대한 독립운동이 다시 통합하려는 노력을 했다. 1941년 4월 국민회와 동지회는 호놀룰루에 있는 모든 한인 단체들을 소집하여 정치 활동을 통일하고 인적 자원과 재정을 통합하려고 했다. 이 두 단체에 가입한 작은 단체들은 한인여성애국회(The Korean Women's Patriotic Society), 조선혁명당(The Korean Revolutionary Party), 조선독립연맹(The Korean Independence League), 민족해방당(The National Emancipation Party), 조선자원자연맹(The Korean Volunteer League), 한중국민연맹(The Sino-Korean People's League) 등이 있었다. 이 회의의 결과로 '재미통합 조선위원회'(UKC : United Korean Committee)를 조직했는데 로스앤젤레스에 지부를 두었다. 이 단체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미국을 도와주고 중경에 있는 조선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워싱턴에 사무실을 운영하면서(이 사무실은 이승만이 사용함) 아시아에서의 한인들의 군사활동과 선전 활동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한인 사회의 불화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맺은 성과의 하나는 국민회와 동지회의 두 기관지를 〈국민보–태평양 주보(Korean National HeraldPacific Weekly)〉라는 이름으로 통합한 일이었다. 이 통합신문은 1942년 1월 21일 처음 발간되어 전쟁 소식, 전쟁에서 한인들이 해야 할 역할, 한인들의 처우 개선 등에 관하여 보도했다. 당시에 하와이에 있던 다른 신문이 그랬던 것처럼 이 신문도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영어와 한국어로 발간되었다.

 진주만 공격 후 재미통합조선위원회(UKC)는 열 명의 대표(각 한인단체마다 대표 1명)로 구성되는 집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를 조직하기 시작했으며 이 위원회가 직접 계엄당국과 교섭하기로 했다. 하와이 영내 민방위 본부 대외협력국의 대중정신전력팀(Public Morale Section)은 그러한 위원회가 각 인종집단이 위기에 처한 미국에 충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리라 기대했다. 1942년 1월 17일 조선집행위원회(Korean Executive Committee)가 조직되었으며 회장은 던(J. Kuang Jacob Dunn)이었고 총무는 손 여사(Nodie Sohn)였다. 회원들은 이원순, 김영희, 임두화 목사, 안창호, David C. 유스(Youth), 조 신부(Noah Cho), C. D. 최(Choy)와 황화수 씨다.

 이 조선집행위원회는 12일 후인 1942년 1월 29일에 첫 회의를 했다. 위원회는 요청받은 바대로 하와이 영토 방위대의 식사 준비, 적십자 단체를 위해서 돈과 옷을 수집하고 재봉일을 하는 것, 수술용 드레싱을 만든 것 등 한인들의 활동에 대하여 보고서를 제출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계엄당국에서 온 보울스(Gordon T. Bowles)도 있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상당히 낙관적으로 평가했다. "나는 조선집행위원회가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고 이제 그들이 해결해야 할 그 무엇(한인의 지위 개선)이 있으므로 내 생각에는 앞으로 약간의 차질은 있더라도 이 위원회가 자력으로 일을 해나갈 수 있다고 본다." 2월에 쓴 또 다른 메모에서 한 익명의 작성자는, "대부분의 한인들이 이제 제법 조화롭게 일하고 있다. 그들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국토방위라는 공동의 임무를 위해 내부의 분쟁을 덮어두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적어도 여러 한인 단체의 지도자들은 지금은 조선독립을 서두르기에는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라고 썼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다시 문제가 생기고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한인 단체들간의 약한 단결을 위협했다. 한 비밀 정보 메모에 의하면 그러한 책임은 한중국민연맹이라는 단체에 있다고 했다. 어떻게 한인 사회의 틈새가 벌어지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단체의 조직과 리더십을 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1942년 1월 9일자 서명 미상의 한 정보 메모는 조선집행위원회가 한중국민연맹 때문에 임무를 거의 착수조차 할 수 없었다고 쓰고 있다. 이 메모는 그 책임을 집행위원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현순에게 돌렸다. "월요일 아침 현 목사가 출근하여 약 30분 가량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한인들이 집행위원회를 꾸리는 모임에 갔다왔다고 말했다. 현 목사는 이러한 위원회를 조직하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그는 이 위원회가 재미통합조선위원회(UKC)와는 독립되기를 원했다. 분명히 그와 이원순이 집행위원회를 서로가 지배하려는 질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 목사는 재미통합조선위원회(UKC)를 반대하는 그룹의 지도자가 되려고 했다. 나는 현 목사가 아주 의지가 강하고 중요한 안건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다음달 날짜로 되어 있는 또 하나의 비밀 메모도 한중국민연맹을 비난했다. "약 30명으로 구성된 이 작은 그룹은 상당히 활동적이었고, 아마 가장 급진적이지 않을까 싶다. 다른 한인 단체들의 동의도 없이 이 그룹은 약간 만족스럽지 못한 성명서들을 언론에 배부했는데, 이 때문에 한인 사회를 대표했던 보다 합리적인 지도자들에게 걱정을 끼쳤다. 다행히 이 그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그 숫자는 줄어들고 있었다. 이 단체에 중국인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는 추측은 대개 와전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거의 공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메모에 첨부된 기록은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조직의 가장 과격한 구성원은 현순 목사였다. 이 단체는 현순을 그들의 대변인으로 선출했다. 현순의 경력과 활동은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다."

 또 하나의 서명 미상의 메모(아마 이것은 보울스가 쓴 것으로 보인다)는 재미통합조선위원회(UKC)의 회원인 이원순의 현순에 대한 시각을 기록하고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한중국민연맹은 한때 재미통합조선위원회를 추진하는 데 힘을 썼으므로 현순의 조직은 이원순 밑으로 들어와 그들과 또다시 협력할 것을 재확인해야 한다. 이원순의 이러한 약간 순진한 입장은 조선집행위원회의 역할을 재미통합조선위원회 아래에 두고 싶어하는 바람으로 단순하게 표명되었다. 이러한 논란은 현순과 이원순 사이에 벌어졌는데, 아펜젤러(Appenzeller), 던(Jacob Dunn), 황화수, 임두화, 그리고 내가 중재자로 나서게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중국민연맹은 새로운 간행물인 〈한중주간저널(The Sino-Korean Weekly Journal)〉을 발간하기 위하여 대중정신전력팀에 허가를 요청했다. 군정당국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 첫째, 동지회와 국민회는 회원이 약 1,000명인데 반하여 한중국민연맹은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둘째, 한중국민연맹과 훨씬 더 큰 두 조직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다. 그런데 한인의 10퍼센트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간행물을 발간하여 나머지 90퍼센트를 반대하는 것은 이미 한인들 사이에 흐려진 물을 더욱 흐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셋째, 새로운 간행물의 등장은 또 하나의 진흙탕 싸움을 촉발시킬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넷째, 한중국민연맹이 전쟁 전에 간행물을 발간한 적이 없었고 전쟁 전에 있었던 두 신문이 하나로 통합된 이상 현재 만족스런 유인물을 다시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섯째, 필리핀인 사회는 한인 사회보다 열 배나 컸지만, 간행물이 두 종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여섯째, 한인 사회의 통합 신문인 〈국민보–태평양 주보〉가 이미 한중국민연맹을 위하여 조직에 관한 기고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그래서 구독자도 쉽게 늘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곱째, 그 신문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모든 한인들의 이익보다는 한중국민연맹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중국민연맹은 항상 자신들의 견해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으므로. 여덟째, 새 신문의 발행은 한인 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보다 소수를 위한 편견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42년 4월경 미국의 정보당국은 재미통합조선위원회 연합이 소멸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1941년 5월 한중국민연맹은 다른 모든 조직들을 규합하여 재미통합조선위원회로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새로운 조직은 공식적으로는 공포되지 않았다. 각 단체들의 성격차가 점차 커지면서 회원단체들은 차츰 철수하게 되었고 과거 자신들의 독립적 위치로 되돌아갔다. 형식적으로 그 조직은 아직도 존재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미 심각한 균열상태다. 한중국민연맹은 미국과 협력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적에 대한 정탐과 스파이 행위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하와이 군정당국은 아직 현순과 그의 조직이 필요했기에 다음과 같은 전략이 제시되었다. "한중국민연맹과 협의·협력하고 기획을 하는 것은 던(Dunn)과 Y. K. 김이 담당하고, 한중국민연맹을 대표하고 같이 일할 두 사람은 나를 신뢰하는 현순 목사와 홍 목사이다. 이 두 사람은 아주 헌신적이고 관점에 있어서는 단호하나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는 타협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현순 목사는 한중국민연맹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또 한 명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은 그 조직의 창시자인 한길수였다. 한길수는 하와이에서 자란 사람으로 그의 조직은 1933년에 창설되어 1,500명의 한인 자원 첩보요원들을 데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나는 호놀룰루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취직해 1935년부터 1937년까지 그곳에서 일을 했다. 나는 그곳에서 케네스 마이다(Kenneth Maida)라는 이름을 사용해서 쉽게 일본인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일본 총영사관 안에서 일본인들이 입수한 진주만 건설에 관한 자세한 청사진과 기술적 정보를 내 눈으로 확인했다."

 일본에 대항하여 한길수가 이루어낸 공적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중국민연맹이라고 불리는 반일 비밀결사 조직의 창설자 중의 한 명인 한길수는 30대의 한인으로서, 호놀룰루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직원들로 하여금 그가 일본에 충성하는 것처럼 속이는 데 성공했다. 한길수는 젊은 사람치고는 동양에 관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모국어인 한국어뿐만 아니라, 중국말과 일본말도 유창하게 사용했다. 1935년 한길수는 호놀룰루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직원들에게 자기가 하와이에 있는 한인들의 가치관을 일본식으로 바꿀 수 있다고 설득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자신이 호놀룰루에 있는 한 호텔의 벨보이로 가장한 채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계획은 자신을 부자보다는 돈 없는 벨보이로 만들어 한인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나 그의 동족들에게 일본을 선전한다는 계획이었다. 한길수는 호놀룰루 호텔에서 이렇게 벨보이로 가장하여 일본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예를 들어 일본인들의 방에서 위스키와 소다를 가져오라고 부르면 그는 이런저런 핑계로 방안을 머뭇거리거나 때로는 무엇을 잊어버린 척하며 방으로 되돌아와서 대화를 엿들었다는 것이다.

한길수가 처음으로 미국 사람들과 미국 정치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937년 10월로, 그가 미국 국회의 청문회에서 하와이에는 일본인들이 너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주로 승격되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을 때였다. 한길수는 또 1940년과 1941년 미 하원 이민위원회에서 하와이에 사는 일본인들의 반미활동을 증언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길수는 하와이를 떠나 본토로 갔는데, 그 행동은 약간 의심스러워 보였다. 재미통합조선위원회의 던(Dunn)은 공개적으로 한길수가 일본 총영사관에 고용되어 그곳에서 용병처럼 일했다고 비난하고, 하와이를 떠난 이유는 사기와 횡령 때문이며, 자신의 돈을 모으기 위하여 하와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속였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길수는 미국 본토에서도 끊임없이 일본인 미국 시민권자들에게 항거했다. 1942년 초 시애틀(Seattle)에서 한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와이, 미국 서해안, 그리고 수도 워싱턴에는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들어와 이중시민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수천 명에 달하는데, 이렇게 일본 조상을 가진 미국 시민들의 '인권'을 지켜주려고 노력하는 미국의 지도자들이 너무나 많다. 미국에서 태어났건 아니건 간에 미국에 있는 모든 일본인들을 잡아들여 전쟁동안 별도로 격리시켜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미국 서해안이 일본인들의 공격과 동시에 발생할 파괴공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일본인 미국 시민권자들의 3분의 2는 이중 시민권자들이다. 이렇게 의심스러운 미국 시민들을 비롯해 모든 일본인들을 격리시키기 전에는 태평양의 방어는 완전하지 못하다. 지금까지 미국 내에서 파괴공작이 없었던 것은 일본 정부가 미국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파괴행동을 절대 하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하와이에 있는 일본인들이 일본을 지지한다고 비난한 사람은 물론 한길수와 현순, 그리고 한중국민연맹만이 아니었다. 어느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는 날짜 미상의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우리는 일본 침략자들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많은 파괴분자들과 간첩들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일본이 또다시 공격해올 때 하와이에 있는 16만 명의 일본인들이 침략자들과 구체적으로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는가?"

 이러한 주장과 활동 때문에 한길수에 대한 평판이 나빠졌지만, 그 때문에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애초에 그들은 한길수를 다음과 같이 관대하게 다루었다. "한길수는 하와이에서 출생한 한인으로 웅변에 재능이 있고, 날렵한 혀를 가진 사람이긴 하나 그의 전력이나 활동으로 봐서는 별로 평판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이러한 결점들을 관대하게 보아주는 것은 그가 한중국민연맹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 후인 1943년 6월 7일 워싱턴에서 있었던 미국 정보기관 대표자 회의에서 그는 재평가되고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었다. "한길수에 대해 논의하는 가운데 그들은 대체적으로 동의하기를, 그가 벌이고 있는 대부분의 선전과 활동은 일본 정부가 원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의심스러운 한 거류민이 적성 정보출처와 접촉하는 정보조직을 운용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가 그에 대한 전모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과 같은 전시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한길수는 한인 사회에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는 중요한 요인이며, 그는 또한 UN활동을 위한 한인들의 보다 효과적인 연대를 방해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어느 FBI 대표는 한길수를 '교활한 선동가로서 돈만 벌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인간'이라고 특징지웠다.

 그 회의를 끝낸 3주 후인, 1943년 6월 28일 한길수는 CIO(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 디트로이트 지부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자연스럽게 FBI도 그 연설을 청취했다. 이 단체가 한길수를 연사로 초청한 것은 그들도 한길수처럼 일본계 미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되며 이들이 집중 수용되어 있던 캘리포니아의 전쟁재배치수용소(WRA : War Relocation Authority)를 미시간으로 옮기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한때 WRA는 이 단체로 하여금 회의를 연기하도록 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결국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 이유는 미국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또한 그 단체가 별로 영향력이 없어서 그런 회의를 방해하는 것이 오히려 그 단체를 뜨게 만들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약 100명이 참석한 그 회의에 관한 정보보고서의 일부이다. "이 회의의 연사는 하와이에 있는 한중국민연맹의 대표 한길수였다. 한길수는 한때 하와이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에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WRA는 그가 디트로이트에 나타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한길수는 WRA 이전 계획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민회 디트로이트 지부장이었던 황(Harry Whang)씨에 의하면 미국에 있는 많은 한인들은 한길수의 처신에 대하여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전쟁채권 판매와 전쟁복구자금 모금 이외의 활동에 개입하고 있던 탓이었다. 그는 한중국민연맹으로부터 축출되었지만 아직도 과거의 지도력 때문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보고서는 그의 연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드디어 한길수가 소개되었다. 그는 네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일본 전쟁계획의 일부는 하와이와 미국에 있는 전략적 지점을 침투함으로써 미국 내의 안보를 훼손하는 데 있다.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일본놈들이 올해 서부 해안과 알래스카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다. 둘째, 미국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아는 것보다 일본 정부는 미국을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셋째, 너무 많은 미국인들이 일본과 일본인에 우호적인 몇 안 되는 미국인들의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극동지역 전문가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문제를 담당하는 요직에 앉아 있다. 넷째, 극우적 일본계 거류민들과, 일본계 미국 시민들이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 있는 대다수의 일본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 회의는 전쟁 후 조선의 독립문제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한길수가 연설할 때 청중들은 거의 지쳐 있었고, 따라서 연설 후 토론은 없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아주 질서 있고 조용하게 건물을 떠났다."

 이 당시 한길수는 워싱턴에 사무실을 두었는데, 워싱턴에서 재미통합조선위원회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던 이승만과 직접 대결하게 되었다. 한길수는 "왜 우리가 이승만 박사의 정책을 반대하는가?"라는 사설에서 이승만을 다음과 같이 공격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놈들이 진주만을 공격한 후 많은 미국인들이 나에게 '왜 당신은 이 박사를 반대하느냐?'고 물었다." 한길수는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이승만은 미 국무성에 미국이 상해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으면 한인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헐(Cordell Hull) 장관이 이승만의 도움은 상품처럼 대가성이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둘째, 한길수는 이승만이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하여 강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을 비난했다. 이승만은 일본 정부와 일본계 미국 시민을 구별했기 때문이었다. 한길수는 이승만을 반대하는 일본 신문 사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한길수는 또한 이승만이 그의 정적을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찍는 성품을 지적했다. 특히 이승만은 일본에 대항하여 중국군과 함께 싸우는 중국의 한인들을 공산당이라고 몰았다. 한길수는 또 지적하기를 일본인들도 이러한 한인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몰았다는 것이다. 넷째, 한길수는 하와이에서 20년 전에 있었던 일을 들추어내어 왜 이승만이 박용만의 인쇄소를 파괴하고, 이승만의 추종자들이 국민회의 건물을 불법적으로 점유했을 때 왜 호놀룰루의 판사가 이승만에게 불리한 판결을 했겠느냐고 물었다. 이승만의 조직인 동지회의 반응은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동지회 시카고 지부는 한길수의 무책임하고 터무니없는 말의 배후에는 불순한 동기가 있다고 비판했다.

 한길수, 현순, 그리고 한중국민연맹을 관찰해보면, 하와이의 독립운동이 공동의 목적을 놓고 단결하는 데 어떤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길수, 현순, 그리고 그들 조직은 극심한 마찰을 일으키면서,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미국 정보기관의 분노를 사게 되었지만, 하와이의 독립운동 집단의 다른 지도자들도 불화를 조성할 가능성이 있는 성품과 노선의 소유자들이었다. 다음의 비밀정보 보고서는 이들 중에서 핵심적인 한인 지도자들에 대한 솔직하고도 재미있는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자료들은 1942년 1월 신원 미상자에 의해서 분석되었고 3개월 후인 4월 보울스에 의해서 재평가되었다.

던(J. Kuang Dunn, 일명 Jacob Dunn)
1월 보고서 : 삶의 대부분을 미국 본토에서 보낸 던은 최근에 이곳으로 왔다. 그의 분열적이지 않은 경력은 그를 중재자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재미통합조선위원회 선전담당 책임자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지위에서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던은 한인 사회의 모든 것에 정통하지는 못했지만 중재인으로서 순수함과 성실함을 가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나에게 자신이 집행위원회 구성에 100퍼센트 찬성하며 그것은 오랜 기간동안 서서히 조화를 이룰 것이지, 기존 조직들과 충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4월 보고서 : 그는 야망이 크고 공격적이다. 현재는 당국에 비위를 맞추고 있지만 그는 모든 당파와 함께 일할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다. 그의 문제점은, 그와 함께 상의한 문제에 대해서 반대하는 행위를 하지 않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을 해서 자주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린(Green) 대령은 그가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군정당국과 함께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던은 나를 완전히 납득시켰다고 생각하고 있다. 계속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고, 그가 만약에 행동을 주저한다면 그가 나에게 편지하도록 하라. 던은 이곳에서 신상을 의심스럽게 하는 사적인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한인 사회의 그의 위치에 크게 영향을 줄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그린 대령과 필더(Fielder) 대령, G-2, 그리고 특히 해군의 여러 정보부원들과 지방 검찰청장, 그리고 주지사뿐만 아니라 그외에도 많은 지방의 정치인들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김현구
국민회의 기관지인 〈국민보(The Korean National Herald)〉의 편집장이며 재미통합조선위원회의 국방위원회 간사다. 그는 진정한 조선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조용하고 온건한 사람으로 한인들을 하와이의 미국 시민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는 이것이 모든 관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원순
재미통합조선위원회의 대표로서 부동산에 관여하고 있다. 이승만이 주도하는 한인기독교회의 저명인사이며 그의 처는 한인기독교학교(Korean Christian Institute)의 교장이다.

1월 보고서 : 이원순은 아마도 한인 사회의 여러 파벌 중에서 가장 균형감 있는 인물이다. 그는 김영기 같은 사색가뿐만 아니라 사업가들, 종교인들과도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생각이 깊지는 않지만 사무를 분명하고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으며 한길수, 현순, 그리고 한중국민연맹 같은 과격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더 많은 한인들이 적어도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한인 사회와 같이 단결하여 일해주기를 갈망한다.

4월 보고서 : 이원순은 별로 마음이 넓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한인들이 재미통합조선위원회 아래서 일하기를 바라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군정당국과 같이 일하는 데는 별로 열성적이지 못하다. 그는 동지회와 관련한 이런저런 일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저명인사가 되고 싶어하나 그러한 위치에 필요한 거시적 안목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그는 부유한 사업가이며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재미통합조선위원회 연례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김영기
〈코리아 시빅 매거진(Korean Civic Magazine)〉의 편집장으로서 진주만과 스코필드 군부대에서 일을 했다.

1월 보고서 : 그는 매우 과묵하며 선동술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4월 보고서 : 그는 바다처럼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아마도 가장 분별 있고 예리한 한인 중의 한 사람이며 잡지의 편집장으로서 사상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독립에 관해서 만큼은 선동가다. 그렇지만 그는 사용하는 언어에 있어서는 꼼꼼하며 조선 사람다운 기질을 갖고 있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조선 사람에 대해서는 반대다(보울스가 '일본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대다'라는 말을 '조선 사람에 대해서는 반대다'라고 잘못 쓴 듯함).

임두화 : 조선감리교회 목사
1월 보고서 : 임 목사는 내가 만난 한인 중에서 가장 공평무사한 사람이다. 그는 어떤 한인 파벌에도 편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같은 비상상태에서는 특히 내부균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강조하는 훌륭한 심리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깊은 사상가는 아니지만 균형감각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갈등이 있는 곳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

4월 보고서 : 임 목사는 한인들 가운데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대체적으로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그러나 공평무사 하다 보니 한인 편이라기 보다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던이 협상이나 기획을 하는 데 있어서는 훌륭하지만 한인 사회의 여러 문제를 논의하기에는 임 목사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조용한 충고를 받기 위해서는 임 목사나 아펜젤러 박사가 최고지만 계획을 세울 때에는 던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유스(David Youth)
1월 보고서 : 데이비드는 자신과 다른 한인들이 적성국 거류민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에 상당히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 나는 그가 상식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그는 한인들의 자금을 동결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보고 있으며 한인들의 대간첩활동에는 공감하고 있다. 그는 한인들의 자금동결이 풀리면 많은 어려움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일본인이 아닌) 한인으로서의 지위를 분명히 해주기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하와이의 군정장관이 강력한 위원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을 대표하고 한인들의 이권을 보호해주기를 원한다.

4월 보고서 : 데이비드는 선동가다. 그는 와히아와의 돈 많은 사업가이며 흥분하기 쉬운 한인 남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의 말은 반일감정이 섞여 매우 거칠다. 그는 지방의 일본계 미국 시민들이나 거류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그럼에도 급진적이지만 열정적인 태도 때문에 한인 사회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며, 더 나아가 좋은 자문가이기도 하다. 믿을 만한 일본인들과 관련된 문제라면 그의 말에 많이 의존할 필요는 없다.

손(Nodie Sohn)
이승만의 지지자이며 남편은 곧 계엄당국에 의해서 유명하게 될 사람이다.

1월 보고서 : 손씨는 일본계 미국인이든 일본계 거류민이든 일본인과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한인들이 고국에서 일본인들에게 비극을 강요당한 후에 어떤 경위로 하와이로 오게 되었나 하는 것을 설명하고, 어떻게 한인들이 100퍼센트로 한인이 아닐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회의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위원회의 뜻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최고로 좋게 말해서 그녀가 회의장을 떠날 때는 그녀 자신이 좀 진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녀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처음으로 모인 이 회의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발단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분명히 한인들이 미국에 대하여 단결된 입장을 취하는 데는 협조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일본계 미국 시민이든 거류민이든 일본인들과 관계를 트는 데는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4월 보고서 : 손씨는 다른 한편 대단히 반일적이다. 하와이의 일본인들과 적성국 일본에 대해 모두 그러하다. 그녀의 조선에 대한 애국심은 바로 반일감정과 직결되어 있다. 그녀의 남편은 돈이 많고(미 육군부대에서 상점을 하고 있음),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시간을 한인 여성들의 구호사업이나 기타 여러 가지 한인 여성들의 활동에 할애하고 있다. 그녀는 중요한 여성이기는 하나 마음이 대단히 편협하다.

조노아 신부
조 신부는 성공회 성직자로서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대단히 조용하며 비교적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중요성은 그가 한인성공회의 대표라는 데 있다. 그는 탁월한 지도자라고는 할 수 없으나 위원회의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매사에 분별 있는 입장을 취한다고 믿을 수 있다. 그는 한중국민연맹의 유일한 대표이기는 하나 불행히도 그는 단체에서 별로 활동적이지 못하며, 그래서 그는 교섭력을 발휘하여 그 단체의 목적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비교적 편파적이지 않아서 서로 상치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두 그룹을 항상 일깨워주는 자문 역할을 한다. 그의 유용성은 내부적인 것이며 그를 자문이나 고문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황하수
1월 보고서 : 황양은 YWCA에서 국제 업무를 보고 있다. 그녀는 한인들의 가정에 가서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불편부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듯하며, 다양한 사람들에 대해서 바른 견해를 가지도록 도와주고 있다.

4월 보고서 : 황양은 한인 젊은이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모든 한인 지도자들에 대하여 완벽하게 공감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녀는 한인들의 문제에 관하여 개인적으로 상담하기에는 좋은 인물이다.

안창호
하와이의 한인 목사로서 독립운동가인 안창호 선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독립운동가 안창호는 1938년 죽을 때까지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했다. 그에 비해 안 목사는 조용하고 겸손하며 그가 한인 사회의 일부를 대표하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사람이다. 그는 분별 있게 투표를 할 수 있다고 보며,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판단된다.

 보울스는 1942년 4월의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한인 사회와 위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관한 개인적 충고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런 것들에 관한 불편부당한 견해를 얻기 위해서는 임과 최 그리고 황이 적합하다. 그 위원회의 다른 인물들은 한인 사회와 위원회와의 관계 때문에 중요하기는 하나 자문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위에 기술한 것들은 미국의 정보원들이 한인 사회와 한인 지도자들을 평가한 견해였다. 그렇다면 하와이에 있는 수많은 일반 한인들은 어떻다는 말인가? 대부분의 한인들이 일본을 반대하고 미국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전쟁 동안에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한인들은 하와이 원주민이나 일본인 혹은 중국인들보다도 더 애국적이라는 것이 나타났다. 한인들의 88퍼센트가 루스벨트 대통령이 전쟁을 잘 치르고 있다고 답했으며, 이는 중국인의 85퍼센트와 일본인의 80퍼센트가 그렇게 답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모든 한인들의 반수 이상은(이것은 가장 높은 비율로 한인들이 54퍼센트였다) 일본이 다시 공격하리라고 느꼈는데, 이에 비해 평균은 23퍼센트였다.

 그렇게 많은 비율이 루스벨트 대통령이 하는 일을 승인하고 일본에 반대했던 이유는, 미국 시민이 아닌 한인 1세대들은 일반적으로 1910년 이후 일본의 조선 지배를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하와이의 한인들을 중국인과 일본인들에 비교하면 배울 점이 있다. 일본인 1세들은 대체로 예의 바르고 전쟁에 관하여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중국인 1세들도 일본이 중국을 1931년과 1937년에 침략했기 때문에 일본을 반대하고는 있었으나, 일본의 침략과 하와이에 있는 그들의 일본인 이웃과는 구별했다. 그러나 한인 1세들은 일본에 적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와이의 일본계 미국인들에게도 적대적이었다.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은 지역사회의 요인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 보고서에 의하면 "한인들은 항상 수가 많은 일본인들에게 크고 작은 핍박을 받았다"고 했다. 또 다른 보고서는 "하와이에 있는 일본인들이 한인들을 모든 면에서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일감정 때문에, 한인들은 하와이 영토 방위군에서 일본계 미국인들을 제외시켜줄 것을 요구하고 일본 2세들만으로 구성되는 대대를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한인들 스스로 일본인들과 거리를 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외국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각에는 한인들은 대단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만약 그들이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오해를 받으면 대단히 화를 낸다."

 한인 2세들은 미국 시민으로서, 그들의 부모들과는 달리 '적국 거류민'으로 분류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한인 2세들은 하와이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적국인 일본과 하와이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분명히 구분했다. 어느 논평자의 말처럼 "하와이 태생 한인들은 어떤 편도 들지 않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2세들도 그들의 부모들과 공감을 했던 것이 있었다. 그들의 어머니들이 사진신부로서 일본 여권으로 하와이에 왔다고 해서 2중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 보거나 혹은 일본에 대해 약간의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한인 1세들은 때로는 일본 본토에 있는 일본인들과 하와이에 있는 일본인들을 구분하지는 않았으나, 일본군에 복무하는 일본인과 한인들은 구분했다. 그러나 2세 아이들은 이런 구분을 하지 못했다.

최근 상당히 많은 조선인 전쟁포로들이 와히아와에 있는 정부 시설에서 일을 해왔다. 나이 많은 한인들은 이들에 대하여 아국과 적국 사이에 흐르는 적대감보다는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노인들은 조선인 포로들에게 사탕이나 맛있는 음식들을 갖다주고 기분좋게 해주고 싶다고 느꼈다. 그들도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몹시 분개했는데, 그들이 조선인들이라 할지라도 적국의 전쟁포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추측하건대 이 한인 노인들은 불쌍한 조선인 포로들에게 어떤 동족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미국식으로 자랐고 조선은 나의 조상들이 태어난 곳이라는 것밖에 다른 의미가 없으므로, 아마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한인 노인들에게는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들은 미국에 대한 충성심과 그들의 가까운 친척일지도 모르는 조선인 포로들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인 2세들은 또한 미국 시민으로서 일본에 반대하는 전쟁에 참가했으며, 따라서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애국심을 발휘했다. 조선에 가서 교육을 받았던 한 젊은 한인은 입대해서 자신의 언어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이군은 군대에서 조선어, 일본어, 영어 통역관이 되었다. 그는 동양 언어를 잘했으므로 미군은 그에게 영어 훈련을 시켰고, 대신 괌(Guam)에서 일본의 암호를 푸는 데 그를 활용했다." 또 다른 한인 가족도 아들과 남편을 군대에 보냈다. "우리 가족은 전쟁 동안에도 꽤 잘 적응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인 영만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태평양 어딘가에 실려가서 298보병부대에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1944년 남편도 군에 입대하겠다고 말했다. 남편이 군에 입대했을 때 우리 아들은 겨우 2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1945년 2월 내 남동생 영철이가 18세가 되자마자 징집을 당했다. 이제 우리 집안에는 세 남자가 미군에 복무하고 있었다."

 한인들의 반일감정 때문에 하와이 계엄당국은 적국 거류민에 관한 법령들을 한인들에게는 그렇게 강력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한인 거류민들은 일본인 거류민들이 일할 수 없는 몇몇 분야에서 일할 수 있었다. 주류 판매권도 일본인들에게는 허가되지 않았으나, 한인들은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한인들은 카메라나 라디오에 대한 금지 규정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한인 거류민들이 일본인 거류민들과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이 묵인되기는 했으나, 공식적으로는 법규 등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았다. 예를 들어 한인들은 허가없이 이사를 하거나 직장을 바꿀 수 없었다. 그리고 한인들은 1943년까지 의약품 구입이나 의료 혜택에서 차별대우를 받았다. 또한 한인들은 비행기를 탈 수 없었는데, 어느 한인은 적국 거류민이라는 이유로 마우이 섬에서 오아후 섬으로 비행기 여행을 할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저명한 의사인 양유찬(후에 미국 주재 한국 대사가 됨) 씨는 진주만 공격 이후 육군에 자원입대해서 장교로 임명받고 꽤 오랫동안 근무했으나 거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월급도 받지 못하고 해고되었다.

 국방 분야의 직장이나 약 800명의 한인들이 근무하고 있었던 군사기지에도 중요한 제약이 가해졌다. 여기서도 모순된 정책이 발견되었다. 해고된 몇몇 한인 1세들의 상황을 손자가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1941년 이만기 씨는 히캄 공군기지의 세탁소에서 트럭운전사로 일하게 되었다. 1941년 전쟁이 일어나자 이씨가 거류 외국인이기 때문에 히캄 공군기지에서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처사에 대해 분개했다. 그는 한인이며 한인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일본의 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그는 다시 그 세탁소로 일하러 갔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직업을 구할 수 없는 2세 한인들도 있었다. "내 여자친구는 최근에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가 직장을 잃었다고 했다. 그녀는 정부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직장을 잃은 이유는 부모가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한인들은 군사기지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지만, 자신들이 적국 거류민이라고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하얀 신분증 대신 검은 줄로 테두리를 한 신분증, 즉 일본인 조상들을 가진 사람들에게 발급하는 그런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야 했으며, 출입허용 구역도 제한되었다. 그래서 항의한 결과 약간의 양보를 받아내었는데, 새 신분증 아래 '나는 한인이다'라는 말을 써넣도록 했다. 그럼에도 예외는 있었다. 한 2세대 젊은이는 그의 아버지가 철판 노동자로 파손된 비행기를 수리했는데, 그는 다른 한인들과는 달리 하얀 신분증을 가졌다고 기억했다.

 이러한 예외에도 불구하고 1세들이 적국 거류민이라고 계속 적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화가 날만도 했다. 한인들이 일본에게 동정적이라는 생각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독립을 위하여 투쟁해왔던 한인들의 마음을 들쑤셔 놓았다. 많은 한인들을 괴롭힌 것은 그들이 겪어야 했던 불편보다는 그들을 그런 식으로 분류하는 것이었다. 어느 한인은 자신들은 계엄령이나 통행금지가 별로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적국 거류민에 대한 통행금지는 미국 시민들보다 더 일찍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에게 통행금지라 해도 단지 저녁을 평소보다 일찍 먹는 것에 불과했다. "남편과 나는 저녁을 빨리 먹었다. 손님들이 8시 통행금지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우리 한인들은 모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고 휴식과 잠이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조금 일찍 잠들고 집안에 있는 것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크게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적국 거류민으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인들은 우리를 자기들의 제1의 적이라고 하고, 또 우리의 미국인 친구들도 우리를 적국 편으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에 충성을 다하려고 하는데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렇듯 미국 시민이 아닌 한인 1세대를 적으로 규정하자 한인 2세 미국 시민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아프다. 나는 미국인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데······. 나는 나에 대해서 미국인 아닌 다른 어떤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나의 부모님들은 항상 나와 누이에게 훌륭한 미국 시민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미국을 해방자라고 생각했다. 왜 한인 거류민들이 적으로 분류되어야 하며, 왜 이러한 것을 아이들에게도 넘겨주어야 하는가? 그들이 일본놈들을 미워했고 자식들에게도 일본을 미워하라고 가르쳐 왔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감정에 자극받아 한인들은 적국 거류민이라는 오명과 그에 따른 제한을 없애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다. 처음에 그들은, 1940년 거류 외국인 등록법에 따라 그들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인으로 등록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들에게 가해진 제약을 철폐하라고 주장했다. 미국 본토에서 거류 외국인 등록법에 따라 등록한 한인들은 일본인들이 수용소에 격리된 것과 같은 그런 대우는 받지 않아도 되었다. 특히 미 법무부의 일본인들에 관한 규정에서 한인들을 제외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하와이에 계엄령이 포고된 이후 법무부는 하와이 섬에 대해서 는 어떤 권한도 없었으며, 1940년 한인이 어떻게 등록했든지 간에 한인에 대한 처우는 하와이 군정장관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인들 역시 편지로, 전문으로, 탄원서로, 또는 개인적으로 워싱턴에 있는 정부관리들에게 자기들이 적국 거류민이라는 지위를 변경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진주만 공격 이후 이러한 활동의 첫째 대상은 미 국무부였다. 한인 지도자들은 한인에 대한 부당한 처우는 조선임시정부와 조선의 독립을 미국이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미국은 중경에 있는 장개석의 정부를 승인했다.

 1941년 12월 16일 하와이에 있는 재미통합조선위원회는 미 국무장관 헐(Cordell Hull)에게 편지를 써서 하와이에 있는 대부분의 한인들은 한일합방 이전에 조선을 떠났으며 그 이후 절대로 일본 당국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편지는 한인들을 '우호적인 외국인'으로 지위를 바꿔주기를 요청하고, 따라서 미국과 싸우고 있는 적국 거류민이라는 오명을 벗겨주기를 바랐다. 하와이의 국회의원 킹(Samuel Wilder King)은 미국 국회에서 한인들의 지위를 변경하고 조선임시정부를 승인하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국무부는 하와이에 있는 한인들의 지위를 변경할 입장에 있지도 않았고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할 가치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인들의 요청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답으로 거부되었으며 미 법무부로 넘겨졌다. 그러나 미 법무부 역시 하와이에 있는 계엄당국을 능가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미 국무부나 법무부는 하와이에서는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한인들은 하와이 군정당국을 통하여 한인들의 지위를 변경하려고 노력했다. 조선집행위원회는 그들의 법적인 지위를 변경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고했다. 그 위원회는 한인들이 전쟁에 기여하기 위해 전쟁채권을 구입하려 해도 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채권을 사더라도 적국 거류민 재산으로 분류될 것이고 결국에는 몰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위원회는 또한 한인들의 미국에 대한 충성심과 군 입대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전쟁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하와이의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이 지위의 변경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탄원했다. "일본의 적인 한인들은 일본의 즉시 패망을 위하여 미국과 동맹국들을 돕기로 결의했으며, 한인들에게 적국 거류민이라고 제약을 가하는 것은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 이러한 지위 변경의 일환으로 한인들은 그들의 재산의 동결을 풀어달라는 것을 가장 먼저 제안했다.

 미 군정당국도 한인들의 지위 변경에는 찬성했지만, 한인들이 다음과 같은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곤란하다고 보았다. "한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아직도 우리 미국인들에게는 낯선 문제다. 그들이 진정 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이 나라의 대국적인 관심사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찾는 것이다." 또 하나의 메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재미통합조선위원회가 하는 일이란 늙고 약간 오만한 지식인이요, 무능한 웅변가이면서, 워싱턴을 맴도는 이승만이라는 사람을 지지하는 것이다. 재미통합조선위원회의 주된 목적은 미국과 중국이 조선임시정부를 인정하도록 사주하는 것이다."

 한인들이 기부금을 내는 추이를 보더라도 위와 같은 한인 활동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지 못하다. 예를 들어 1943년 재미통합조선위원회는 연간 예산을 6만 달러로 편성했으며 이 중 4만 달러는 하와이에서 모금할 것이었다. 총 예산 중 3만 달러는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에, 1만 5천 달러는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의 구미위원단에게 보냈다. 하와이 군정당국의 말을 인용하면 "하와이 한인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조국 해방이다. 미국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2차적이다. 그들은 미국을 돕는 것이 곧 조선을 돕는 것이 될 때만이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 당국자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한인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변경하고 재산 동결을 풀고자 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활조건 개선보다는 그들의 목적인 독립을 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신중함에도 불구하고 미 군정당국 실무자는 한인들의 지위를 '우호적인 거류민'으로 변경시키자고 제안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보고서에는 일본 정부도 조선인들과 일본인 혈통을 가진 사람들을 구별하고 조선인들을 차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이 한인들의 지위를 변경할 수 있는 적절한 근거가 된다고 제시하면서, 1940년의 인구조사와 거류 외국인 등록법에 따라 사실상 한인들이 별도로 취급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지위 변경은 한인들이 품고 있는 불만을 제거할 것이고 따라서 일본과의 전쟁을 열성적으로 지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지위의 변경으로 일본 정부가 얻을 이익은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보고서는 재미통합조선위원회가 작성한 서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일본인과 한인들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분명히 다르며, 한인들은 하와이 영토의 안보를 위해서 그들에게 가해진 제약에 대해서는 불만이 별로 없으나, 다만 그들을 일본의 신민으로 분류하는 '폭력적 전문성'만 바뀐다면 미국의 국토 방위에 더욱 열심히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문서는 또한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법외적인 특혜가 한인들에게 부여된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이는 일종의 비공식적인 승인이라고 여기고 있으나 "만약 한인들이 계속해서 적국 거류민으로 분류된다면 솔직히 말해서 한인들에게 정신적인 상처를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모든 요청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의 지위는 변경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1942년 3월 포인덱스터 주지사가 한인들에게 부과된 재정적 동결을 풀어주고 한인들을 '일반적으로 허가된 국민'으로 규정함으로써 한인들을 약간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는 곧 한인들로 하여금 특수 허가증을 가지고 자유롭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은행에서 돈도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도록 했다.

 주지사의 조치는 환영할 만했지만 아직도 한인들이 원하는 바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인들은 그들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미국의 동맹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했다. 한인들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재미통합 조선위원회가 하와이 군정장관 에먼스(Belos C. Emmons) 장군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1905년 이후 조선의 일본인들에게 가한 게릴라 공격,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과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그리고 1937년 이후 중국인들과 함께 일본에 대항하여 싸운 기록이 실려 있었다. 그 탄원서는 또 미국의 전쟁 수행이나 안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한인들에게 이미 허용된 특별한 권리들을 다음과 같이 예로 들었다.

"재정적 동결을 풀어준 것, 미국 본토의 적국 거류민에 대한 법무부의 제약으로부터 면제된 것, 일본인들과 같이 미국 서부 수용소에 보내지 않은 것, 캘리포니아의 한인들로 하여금 주 방위군의 한 부대를 자체적으로 조직하게 허용한 것, 그리고 군정하에서도 하와이의 한인들을 관대하게 대우하고 있는 점 등"이다. 그 탄원서에서, 한인들을 '우호적인 외국인"으로 지정해주기를 특별히 요구했으나 모든 것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한인들은 주로 워싱턴 정부와 하와이의 군정당국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목표를 여론에 널리 알리려는 노력도 했다. 하와이의 한인들은 미국인들의 눈에 일본인과 한인들이 구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독립운동단체들이 준비한 특수한 신분 카드, 버튼을 소지하거나 자동차에 스티커를 부착함으로써 자신들이 한인임을 밝히려고 했다. 그리고 한인 여성들은 그들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한복을 더 자주 입었다. 당시 한인 여성들의 행동에 대하여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한인 노인들은 자신들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고유 의상인 흰 한복을 입었는데, 때로는 등화관제 시간 이후에 붙들리기도 했다. 이런 사례는 적어도 여러 번 있었다. 어느 여성은 조선말로 '나는 조선사람'이라고 말하고 그녀를 붙잡은 경찰을 오히려 큰 소리로 꾸짖기도 했다. 대체로 이런 경우 붙잡힌 사람들은 순찰차에 태워져 경찰서로 인도되었다. 이런 노인들이 밤에 나다니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전쟁 전에는 노인들이 밤에 영화를 보려고 다니는 경우는 좀체 없었다. 그들이 외출하는 것은 단지 마실갈 때뿐이었다."

 또 다른 노력들은 인쇄물을 통한 것이었는데, 주로 〈국민보–태평양 주보(Korean National Herald-Pacific Weekly)〉의 영어판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 신문의 사설들은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니고 분명히 다른 민족이며,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고 일본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도 없으며,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을 적으로 선언했으며, 하와이에 조선 여권을 가지고 왔고, 그 이후에는 미국에 충성해 왔다고 말했다.

 그들 말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한인들을 일본인과 구별한 사례는 많다. 미국 정부는 인구조사에서 한인들을 일본인들과 구분했고, 1913년 캘리포니아에서 한인 노동자들과 관련된 분쟁이 제기되었을 때 일본 영사가 그들을 대변하려고 하자 한인들이 이를 거부한 것을 미국이 지지했으며, 그리고 1913년과 1916년 사이에 한인들이 여권 없이도 미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한인들이 미국에 귀화하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신문들은 한인들이 미국의 제도, 원칙, 관습에 충실해왔으며 역사적으로나 어떤 경우를 보아도 일본의 적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한인들의 지위가 변경되지 않은 채 1년이 지나가자 그 신문의 사설은 또다시 이렇게 썼다. "그토록 우리가 저주하는 명칭인 일본의 신민이라든지 적국 거류민이라는 오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우리의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명칭은 계속해서 우리의 의사에 반하여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에게 붙여지고 있다. 이 세상에 한인보다 더 일본놈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이 두 민족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위의 질문에 대해서 절대로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당국이 보잘것없지만 친구를 적의 범주로 분류한다는 것은 보통 단순한 조선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인들은 이 저주스럽고 고통스러운 꼬리표를 떼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한다. 모든 미국인들이나 그들의 조상들도 한때는 어떤 폭정으로부터 피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1943년 봄 하와이에 있는 두 큰 신문들은 한인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언급했다. 하와이의 유력 신문인 〈호놀룰루 스타–불러틴(Honolulu Star-Bulletin)〉지는 한인들의 문제를 '불공평과 비극'이라고 말하고 "한인들은 자신들의 적, 자신들의 무자비한 착취자들, 자신들의 더할 수 없는 억압자들과 똑같이 평가되는 누명을 쓰고 있다. 한인들이 계속하여 적국 거류민으로 분류된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도했다. 2개월 후에 같은 신문은 사설에서 "한인들에 대한 분류는 하루빨리 법적 해석이 바뀌어야 한다. 만약에 어떤 국가나 국민이 미국으로부터 도움과 이해와 동정과 자비와 친절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조선이며 조선 사람들이다"라고 논평했다.

 또한 〈호놀룰루 어드버타이즈(Honolulu Advertiser)〉도 좀더 신중한 논조이긴 했지만 호의적이었다. 그 신문은 국회가 이 문제를 거론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한인들은 미국도 그들을 동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것이 조금이라도 힘이 된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라"고 충고했다. 그 신문은 또한 한인들이 겪는 고난의 일부는 자신들의 분열과 싸움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과 동시에 하와이의 한인들은 자원봉사나 전쟁 수행을 위한 모금과 같은 국방 관련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협력하는 동맹자로서의 자신들의 이미지를 높이려고 했다. 1942년 봄 한인들은 미국 적십자사를 위하여 1,000달러 이상을 기부했으며, 1943년 '한인승리모금운동(Korean Victory Drive)'에서 26,000달러 이상을 모금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일본과 싸우는 데 쓰라고 보냈다.

 어느 한인은 자기 가족이 어떻게 이 일을 했는지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나의 아버지는 젊고 유능한 재봉사를 고용하여 어머니가 공장을 떠나 다른 일을 하실 수 있도록 했다. 어머니는 그리하여 한인사회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많은 한인 여성들이 매일같이 미국 적십자사를 위해 봉사활동을 했다. 그들과 함께 어머니는 많은 시간을 붕대를 감는 일에 바쳤다. 어머니는 또한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전쟁채권을 파셨다. 우리집도 여러 아이들이 25달러짜리 채권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들은 두말할 것 없이 더 큰 금액의 채권을 구입하셨다."

 한인들은 또한 하와이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물론 그 아이디어는 반일적인 색채와 편견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일본인들을 더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하와이를 침략한다면 내부 소요가 일어나 일본인들과 일본계 미국인들이 한인들을 가장 먼저 공격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그들이 일본인들을 증오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을 공격하거나 선동하지 않음으로써 질서 유지에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한인들이 자비심이 있다 해도 비상시에 일본인들이 호놀룰루에 있는 한인교회를 대피소로 사용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위는 바뀌지 않았다. 1943년 3월 적국 거류 외국인에 대한 법규가 바뀌어졌을 때도 한인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한인 지도자의 한사람인 손승운이 통행금지 위반으로 체포되자 적국 거류민 문제가 여론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59세의 손승운은 1905년 하와이에 와서 구두수리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한인독립운동에도 열심이었는데 이승만의 조직인 동지회의 회장이었다. 그의 처인 노디(Nodie)도 이승만이 창립한 한인기독교학교(Korean Christian Institute)의 교장과 동지회의 간부였고 이승만의 친한 친구였다. 1943년 3월 28일 밤 손씨의 자동차가 엔진이 꺼져버렸다. 그때가 오후 7시 45분이었는데 등화관제 시간 전에는 집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8시 15분 그는 두 경찰에게 체포되었는데, 그 중 한사람은 일본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적국 거류민은 등화관제 이후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규정에 따라 50달러의 벌금을 내고 훈방되었다. 이 사건은 묻혀 있다가 4월 30일 그가 군사법정에 가서 증언을 하면서 여론화되었다.

 이 증언에서 손승운의 변호사는 그가 우호적 외국인으로 처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일합방 전에 조선 여권을 가지고 하와이에 입국했고 조선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일본을 적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손승운이 거류 외국인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은 미국법이 그가 귀화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 변호사는 또한 미국 본토에서 법무장관이 한인들을 보다 관대하게 대우하는 것을 전례로 들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육군성에도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도 인정했다. 군사법정은 손승운과 다른 한인들의 딱한 사정에 대해서 동정을 표시했으나 군정장관의 명령에 따라서 손승운에게 위법 판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손승운에게 10달러의 벌금을 물렸으나 지불은 유예되었다. 이것이 통행금지를 위반하여 체포된 한인 거류민의 유일한 예는 아니었으나 손승운 부부는 이 사건을 거기서 끝내려고 하지 않았다.

 손은 에먼스 장군에게 자기의 판결을 재고해달라고 탄원했으나 에먼스 장군은 군법정의 판결을 번복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한인들은 계엄법에 따라 계속해서 적국 거류민으로 대우를 받을 것이라 선언했다. 그리하여 손승운의 부인 노디는 이승만의 개입을 원했는데 그는 이 문제를 미국 국회로 가져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박사는 4월 말 노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은 일본이 아니라 조선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놈 경찰을 보내서 조선의 독립지사를 체포하라고 한 것은 정말 내가 들은 것 중에서 가장 엄청난 일이다. ······우리는 이 나라를 미국인들이 지배하는지 일본놈들이 지배하는지 알아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은 그 당시 미국 내에서의 조선독립운동을 독점하고 있다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던 터였다. 재미통합조선위원회와 관련한 그의 지위 문제로 몇 달간의 갈등이 빚어지자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의 사무실 운영비 지불을 중단하게 했다. 그 때문에 특히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재미통합조선위원회 지도자들은 이승만을 제치고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하기를 원했다. 이승만은 역공을 취하여 로스앤젤레스의 지도자들을 비난하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분리 규합하기 시작했다. 한 증언자는 이승만의 반대자라고 자처하면서, 손씨에 대한 이승만의 관심은 하와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일 뿐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승만의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는 재빠르게 하와이에 있는 국회의원 파링턴(Joseph R. Farrington), 육군성의 관리들, 국무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 루스벨트 대통령과 접촉했다. 이승만의 호소에 공감한 파링턴은 육군성 차관 맥클로이(John C. McCloy)에게 편지를 써서 손씨의 유죄판결을 그대로 둘 것인지, 만약에 그렇다면 다른 많은 경우에 한인들을 우호적인 외국인으로 처우하는 것과 모순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물었다. 육군성의 한 관리는 이에 답하여 하와이에 있는 군정장관이 '군사적인 필요에 따라서' 한인들을 적국 거류민으로 계속 분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관리는 왜 이러한 주장이 계속 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설명할 재량권은 없으나, 적국 거류민이라는 분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한인들을 우호적인 외국인으로 계속 처우해 왔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파링턴이 "한인들에게 하와이 정부가 그들이 미국에 충성하는 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말해줌으로써 한인들을 진정시켜주기를 바랐다."

 스팀슨은 1943년 7월 7일 이승만에게 보낸 회답에서 하와이의 한인들이 이미 받고 있는 많은 혜택에 대해서 언급하고, 육군성은 일본에 반대하여 투쟁하고 있는 한인들의 협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군사적 필요'와 '국내 안보'를 위해서 몇 가지의 제약은 계속 한인들에게 가해졌다. 이승만은 또한 7월 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을 대신하여 벌(Adolf A. Berle Jr.) 국무차관으로부터 회답을 받았다. 그 회답은 하와이 당국으로 부터 온 것이었다.

 

 

 

 

 

 

출처: 하와이 한인 이민 1세, 2003. 1. 13., 도서출판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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