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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미국의 전후 한반도 신탁 통치 구상

by 바스통 202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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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로 회담에 기반한 한반도 국제 공관론 즉 신탁 통치는 한국 근현대사의 뜨거운 감자로 불린다. 이론 인해서 한국의 분단이 영구화 되었으며 국내적으로 심각한 정치적 대립과 휴유증을 낳았고 대외적으로는 냉전적 상황과 맞물려 종국에는 한국전쟁이라는 유혈 사태가 벌어진 단초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무시 할 수 없이 중요한 획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탁통치가 단순히 전후에 일본의 무장해제를 과정에서 연합국 공동의 합의에 의해 이뤄졌다고 생각하지만 카이로 선언 이래로 신탁 통치 안은 미국의 정책적 결정에 따라 이뤄졌으며 그에 기반하여 소련군의 진주가 거부 없이 이뤄졌던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 국제 공관론이 처음 등장 한 것은 1942년 초부터 미국의 언론에서 그 면모를 볼 수 있다. 당시에 미국 언론사들은 공공연하게 공관론에 대해서 보도하였는데 이 중에는 타임이나 라이프지, 포춘지 등 메이저 언론사도 포함하고 있다. 이들 언론들은 한국 사람들이 행정 능력이 없고 지도자가 될 인물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에 공동 통치가 필요하다고 보도 하였다. 심지어는 1943년에는 구체적으로 FDR과 영국의 이든 외상이 한반도 신탁통치에 대해서 합의를 하였다는 보도를 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중국 중경의 한인 단체들과 한국 독립당등 각당이 대규모로 항의 성명을 발표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언론의 보도는 미국 정부의 대전 후 전후 질서 계획 과정과 순서에 비춰볼때 그 세부적 사항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도된 가십성 보도에 가깝다. 극동에 대한 정책 담당은 국무부 극동국 소관이었지만 모든 전후 대외 정책 결정이 그렇 듯 한반도 신탁통치에 대한 구상도 대외관계협의회와 국무부내 전후 대외 정책 자문 위원회에서 처음 구상되었다. 

 

 이 두 기관의 구상에 따르면 동북아에서 미국의 제 1 목표는 중화민국의 부흥과 경제적 안정이었다.1 좀더 정확하게는 중국을 중국과 그 권역 내로 국한 시키고 동남아 지역에서 간섭을 배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관동군이 점령하고 있는 만주 지역은 소련과 합의하에 중국에 귀속 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부각 될 수 밖에 없었다. 즉 만주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소련은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향력을 배제할 수는 없게 되며 전통적으로 한반도의 맹주를 자처하는 중국이 이를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또한 미국도 극동에 세력을 구축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렇게 주변국들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히게 된 한반도에 대해서는 강대국들 간의 배타적 영향력을 배제해야 했으며 그에 따라 나온 것이 신탁통치안이었다. 하지만 그 구상은 1942년~1943년까지는 이름 뿐이었으며 세부적인 사항이 마련 된 것은 1942년 중반을 넘어갈 무렵이었다. 

 

 이렇게 미국의 전후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신탁통치구상은 처음으로 카이로 회담에 올려졌으며 영국과 중국의 동의를 받게 된다. 그리고 1945년 얄타에서 궁극적으로 소련의 구두 승인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이 한반도 신탁통치는 연합국의 전시 회담을 통해서 합의 된 것이 아니라 미국이 독자적으로 구상한 안을 전시 외교를 통해 연합국 정상들로 부터 동의를 받은 것이었다. 이렇게 전시 중 이끌어진 통치 안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공식적인 합의안이 될 수 있었고 한반도 문제가 유엔에 이관 되기 전까지 전후 일관된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볼때 미국의 신탁통치안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일방적인 영향력을 배제함으로써 극동에서의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이익을 보장 받는 것을 주안에 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강대국들이 피식민지 국가들의 민족해방운동을 억제하고 자국의 질서 속에서 무난히 편입시키려는 성격도 간과할 수는 없다. 때문에 미국이 구상했던 신탁 통치안은 잠재적으로 민족적 반발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한국 임정을 포함한 국내외 한인 독립 단체들을 자극하였고 이는 전후 반탁 운동으로 표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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