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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조선 후기-구한말 정치 변동과 군사 기술 변화

by 바스통 202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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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은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략을 조선이 현실적인 위기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영불 연합군의 북경함락이 있던 1860년대 라고 할 수 있다. 1차 아편 전쟁이 직접적인 인식의 계기가 되지 못한 것은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베이징 함락의 경우 전쟁 상황이 정확하고 상세하게 조선 조정에게 보고되었다. 천진조약 체결과 함풍제의 열하 몽진, 원명원의 파괴 그리고 북경협약 체결 등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 패배하고 있다는 자세한 정보들이 속속 조선에 전해졌다. 거기에 더 나아가 철종 11년에 김경수의 긴급 보고는 청국과 서구 열강 간의 새로운 조약 내용을 일일히 열거하며 전하게 되었는데, 특히나 청나라가 천주교의 선교활동을 인정하는 내용과 배상금 은화 8백만량을 지불하게 되었다는 내용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보고를 받은 철종은 그 다음날 중신 회의를 소직하여 서양 열강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위기감을 토로했는데 <승정원 일기> 철종 11년 12월 10일 기사를 보면 철종이 서양의 군사력에 대한 심각한 위기감과 불안을 토로하는 대목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위기감이 곧 조선 군사 기술 강화로 연결 된 것은 아니다. 이는 단순하게 서양 군사력에 대한 위기감만 인식시켰을뿐 군사 기술 강화와 군사력 재편은 대원군 시기와 병인양요를 전후하여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12세의 어린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 섭정으로 흥선 대원군이 전면에 들어나게 된다. 흥선 대원군은 익히 알려져 있다 싶이 강력한 쇄국양이 정책을 내세웠는데 그 같은 정책의 사상적 기반인 위정척사 사상은 성리학을 극단까지 순화시킨 것으로 조선 정부의 쇄국 정책에 대한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내적으로 일어난 왕권 강화와 맞물려 대원군과 그를 지지하는 위정척사파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 집권 강화는 외적으로 서구 세력의 외압을 막는 골조가 되었다. 사상적으로 쇄국 양이론을 기반으로 한 이 집권화 정책은 군사적으로는 조선 정부를 중심으로 관민을 총 동원해 결사항쟁을 벌리는 것으로 과거의 군사정책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민관군의 결집이 병인양요 과정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현실적인 힘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할때 1860년대 들어 대외적 위기에 대해 조선 정부는 군사적 정비의 필요성을 절감하지만, 이에 대한 대안은 중앙집권화된 정부를 중심으로 관민일체 단결과 항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조선의 중앙집권적인 대응 방식은 미시적으로는 병인양요를 극복하는 힘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정치적으로는 병인양요를 통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해 자체를 거세시켜버렸다. 이는 엄연하게 일본의 양이전쟁의 결과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일본의 양이 전쟁은 외세의 침략이지만 동시에 막부와 각 번간의 군사적 긴장에 촉발된 전쟁이었고 결과적으론 사쓰마 조슈와 막부 간의 대립 관계를 폭발시켜버린다. 표면적으론 양이론을 내세웠던 사쓰마 조슈는 동시에 막부 체제의 해체 또한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이전쟁의 결과로 양이론은 폐기하고 적극적인 서양 군사 문물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의 정치적 상황은 강력한 중앙 집권을 통해 사상적 기반이 되는 주도 세력이 권력자와 결탁하여 모든 정책 사항을 일원화, 경직화 시킴으로써 군사력 신장의 필요성을 절감함에도 서양 기술을 받아들이는 논의는 원천적으로 차단될 수 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차이는 결과적으로 양국의 근대화가 막번체제와 중앙 집권 체제라는 일본과 조선의 정치 구조의 특수성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 이런 군민 일체를 통한 중앙 집권적 쇄국 정책은 군사 정책에도 영향을 준다. 대원군 시기의 군사정책을 이끈 사람은 신관호였다. 그는 강렬한 양이론을 기반으로 군사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의 군사정책은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해 지구전을 전개, 산성과 산맥을 중심으로한 복잡한 한반도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는 전통적인 방어 전술의 연장에 있었다. 이런 전술은 병인양요에서 그대로 들어나게 된다. 병인양요 이후, 조선의 군사력은 포군을 중심으로 정비되어 나갔다. 조선 정부는 1866년 경기감사 유치선의 건의에 따라 무과에 화포과를 신설한다. 그리고 이양선 출몰이 잦은 서해안을 우선으로 하여 포군을 강화시키게 된다. 이때문에 당시 방비를 담당하던 5군영; 훈련도감, 진무영, 군위영, 어영청, 총융청에서는 대규모 포수의 조직과 편제가 활발하게 이뤄지게 된다.

 

 포수의 양성과 동시에 새로운 무기 개발 시도도 있었다. 특히나 신관호 자신이 독자적으로 공을 들였던 수뢰포는 일종의 기뢰로써 내해로 들어오는 이앙선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의 해국도지를 참조하여 만든 이 폭탄은 실전에 사용되진 않았지만 이양선이 한강을 따라 올라올 것을 대비해 다수가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무기 체제 개발 시도가 대원군 시기의 자주적인 국방 의지로 선전하는 시각을 교육과정에서는 평가하고 있지만 포군을 중심으로 한 증강과 이런 무기의 시도는 당시 조선이 놓여있던 상황과 한계를 볼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해양 전투에서는 서양 열강의 군함과 대포에 맞설 수 없었고 강화성 전투에서 보여주듯 정면에서 서구의 보병 전력과 화력전은 극도의 열세에 놓여있었다. 나아가 서양으로부터의 군사 기술 습득과 병기의 수입도 당시 조정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할때 불가능했다. 결국 새로운 시도는 청나라의 구시대적 군사 기술과 당시 조선의 군사기술이 합작하여 우회적인 방법으로 열세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신관호를 중심으로 조선 정부가 건설해오던 군사정책은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도마에 오르게 된다. 신미양요의 전개 과정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으니 여기서는 빼겠지만 신미양요의 성격을 규명하자면 막대한 량의 물량이 투입되고 소비된 근대적인 전투의 면모를 띄고 있었다. 미군과의 접전에서 조선군은 대규모의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지만 조선 정부의 입장은 너무도 강고했음으로 물러난다. 이 전투 이후에 조선의 양이론은 더욱 강화비까지 세워지게 되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신미양요 이후에 다시 한번 조선의 포군은 급팽창시키게 된다. 이는 <개화기 군사정책 연구>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런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양이론을 고수한 대원군은 실각하게 된고 이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개항하게 된다. 하지만 1876년 이래로 일본과 조선은 군사적으로 명확한 격차를 보이게 된다. 강화도 사건은 일본과 조선의 군사적 기술 격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오죽했으면 조일수호조약 이후 일본 대리 공사가 유학생 파견에 관한 서간에 '일본은 의술 기기 군수 측량 등에 있어서 다행히 약간의 '진보'가 있다'고 썼겠는가? 이는 이전에 다뤘던 일본의 상황과 대조해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내전 체제를 거치면서 각종 서양 무기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무기의 용의성 그리고 전술과 기술과 제반 시설과 기술 대해 이해할 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반면에 조선의 경우 서양 군사 기술이 유입된 모든 창구가 막혀버림으로써 갑자기 맞닥뜨리게 된 서양 군사기술과의 기술적 격차를 자체적으로 해소할 수 없었다. 특히나 총기의 경우 19세기에 들어서 빠르게 진행된 총기 발전은 그 발치를 조금이라도 따라갔던 일본조차도 힘겨운 일이었으며 국제 무기 시장과 오랜 시간동안 단절되어있던 조선은 신식 총기 생산의 필요성을 절감함에도 뚜렷한 성과를 낼 수 없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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