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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19세기 파견 무관의 역할과 영향

by 바스통 2021.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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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는 각국 대사관에 파견 되는 파견 무관의 전성기였다. 당시 각 유럽 열강의 귀족 엘리트 계층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파견 무관은 특유의 귀족 엘리트 주의와 나폴레옹 전쟁의 유산과 결합하여 독특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세기 당시의 파견 무관의 역할 또한 현재의 파견 무관의 역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재국에 상주 하여 평화 시에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면에서는 주재국의 군사적 정보를 수집하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또한 제 3국에서 전쟁이나 군사적 행동이 발생할 경우, 특권적 지위를 부여 받고 이것을 직접 참관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파견 무관은 크림 전쟁 시기에 프랑스에 상주 했던 영국 군인 에드워드 클레어먼트(Edward Stopford Claremont)이나 파견 무관의 등장은 나폴레옹 전쟁 이래로 유럽 사회 전반에 불어 닥친 관료주의의 전문화의 영향으로 외교를 다루는 외교관과 대외 국방을 파견 무관을 분리할 필요성이 증대 되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시 유럽은 산업 혁명으로 인해 군수 산업이 고도화 되면서 최신 무기들이 적극적으로 개발되고 대량 생산되어 도입되던 시기였다. 이런 만큼 각국은 상대국의 최신 무기 개발 현황과 도입 현황에 대한 정보의 중요성이 증대 되었다. 또한 주재 국의 정치적 상황과 필수적인 군사 정보들을 보다 전문적으로 수집하고 분류, 분석하여 본국에 신속하게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징병제 국가의 확대로 인해 고위층의 정치적 상황만 아니라 시민 동원과 대민 정치 선전 활동을 분석해야 할 필요성 또한 제기 되었다. 이에 따라 파견 무관은 고도화 된 군사 전문가로서의 역할과 더불어 어느 정도의 사회 분석 역량과 정치적 판단력도 요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870년대 30명에 불과했던 파견 무관은 1914년에는 300명으로 증가하였다. 또 '주변부 국제 분쟁'들을 직접 참관하고 전략, 무기,병참, 의료, 수송 등 다양한 종류의 보고를 본국에 보냈다. 또한 귀족 엘리트 출신이었던 당시 파견 무관들은 전쟁의 전략 전술적 측면만 아니라 인적 물적 자원 배분, 명령의 수행 상태, 민심의 상황 등에도 큰 관심을 보이며 이를 세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이런 파견 무관의 '귀족 출신 엘리트'라는 출신 성분은 파견 무관의 역할을 넘어 외교에도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19세기 당시의 파견 무관들은 국가라는 테두리에 속해 있지만 동시에 국가를 초월한 '귀족'이라는 초 국가적인 테두리에도 소속되어있었다. 때문에 파견 무관들은 자국의 이해 관계를 관철하지만 동시에 귀족으로써 때로는 협상과 타협을 통해 열강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거나 중재하는 행위 자의 역할 또한 가지고 있었다. 비록 19세기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귀족성이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귀족주의 전통은 깊게 외교가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

 

 이런 귀족성은 곧 사교 클럽 문화로 발현 되었는데 이는 통해 파견 무관들 주재국의 고위 관료 귀족들과 친분을 쌓고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좀 더 순한 분위기 속에서 협상을 이끌거나 이해 관계를 조정하여 세력 균형을 맞추는 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파견 무관과 귀족들의 사교 활동은 때로는 유럽 내의 분쟁 당사국들 간의 적대 감정을 누그러 뜨리고 상대 국에 대해 가혹한 보복을 막는 기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귀족 엘리트 출신의 파견 무관들은 20세기가 넘어오면서 시민 사회의 성장과 더욱 더 전문화 된 관료를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을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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