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말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본격적으로 태평양 전쟁을 막 시작하던 시기, 연합국 측은 국제적십자위원회를 통해서 일본 측에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 속칭 제네바 조약을 상호 준수하자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에 일본은 “조약의 체결국이기는 하지만 비준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속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제네바 조약의 규칙을 준용한다”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폈다. 이런 모호한 포로 협정에 대한 태도는 이후 포로에 대한 강제 노동이나 군속 문제를 야기하는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일본 또한 제네바 협약을 준용한다고 통보한 이상 일본군은 전쟁 전부터 <포로수용소령>을 내려 포로들을 수용할 준비를 하긴 한다.
문제는 익히 알려진 대로 개전 직후 일본군이 동남아 식민지들에서 집어삼키게 되면서 20만 명이 넘는 포로들을 감당해야 하면서 발생 되었다. 이 숫자는 일본의 생각보다 좀 많이 많았다. 결국 1942년 2월 중국 상하이와 홍콩 그리고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 포로 수용소를 설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일본의 식민지 혹은 점령지였던 대만, 태국, 말레시아, 필리핀 등에도 수용소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던 조선에도 일본은 포로 수용소를 건설하고 포로를 수용하였다.
재미있게도 연합국 포로들을 조선 내 수용소에 수용한다는 아이디어는 일본 육군의 중앙이 아닌 조선군에서 처음 제안 되었다. 처음으로 이 계획을 구상한 조선군은 연합국 포로를 수용하여 조선인들에게 '백인에 대한 존경 의식'을 없애고 '일본의 필승의 신념'을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이를 위해 백인들이 사용하던 외국인 학교나 신학교 부지를 활용하여 포로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이 포로 수용 계획의 원안은 외국인 학교나 신학교 부지는 너무 호화롭거나 과분하다는 이유로 기각 되었고 대신 폐공장이나 임시 수용 부지에 건물을 짖고 수용한다는 것으로 변경 된다. 이 변경 된 계획은 그대로 시행 되어 서울과 인천에 1차와 2차 수용소가 건설 되는 것으로 결정된다.
이 계획에 따라 1942년 8월 싱가포르의 '창이 수용소'에서 영국 및 영연방군 포로 1천명이 부산에 도착하여 임시 수용소에 수용 된다. 부산의 이 수용소는 임시 수용소로 조선군 예하 제72병참 경비대가 과거 미8군 하야리아 부대 위치에 주둔하여 조선인 군속들을 교육하던 곳이었다. 재미 있게도 이 곳에서 교육 받은 조선인 군속들이 국외 수용소로 파견이 되던 시기와, 연합군 포로들이 해당 수용소로 들어오던 시기가 거의 일치하는데 아무래도 부산 임시 수용소에서 '실습'을 겸해 조선인 군속들에게 포로 관리를 시킨 것을 보인다. 그러나 곧 포로들은 다시 선별을 거쳐 경부선을 타고 500명은 인천에 수용되었으며, 나머지 500명은 서울에 따로 수용 된다.
서울과 인천의 수용소들에 수용 된 포로들을 일본은 철저하게 최소 수준의 생활 만을 보장한 체 노동을 시켰다. 서울의 포로들은 일본군 육군창고 건설, 경성역, 한강 다리 보수 등 서울 지역 내에 있는 각종 허드렛일에 동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천에 있던 포로들은 주로 인천항 매축 공사나 방파제 항만 공사에 되거나 경인선 철도 공사에 동원되었다. 일제의 포로 노동력 동원은 이후에도 계속 되어서 인천과 서울에 있던 연합국 포로 200명 가량을 차출하여 1943년 9월에 3번째 포로 수용소를 함경도 흥남에 설치하여 질소 비료 공장에 배치하고 비료 생산에 동원 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조선군이 노렸던 선전 효과를 위해 조선인들에게 포로 노동 현장을 자주 목격 시켰다. 조선인 마을 인근에서 노동을 시키거나 혹은 조선인들의 노동 현장과 인접한 곳에서 노동을 시키는 식이었다. 물론 조선인들과 포로들 간의 교류는 일본인 군속에 의해 당연히 차단 되었다. 하지만 몇몇 연합국 포로들은 군속들 몰래 조선인 청년들과 교류하여 영어를 배우거나 정보나 물자를 교환하는 행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중에 대담한 포로들은 조선인 청년들과 결탁하여 탈출을 감행하는 시도 또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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