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발발한 러일 전쟁은 당시 러시아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전쟁이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당시 러시아의 무기 체계는 낡았고 전술은 낙후 되었고 고위 장교들은 불화로 점칠 되어있었다. 사회적으로도 차르 체제의 모순이 심화하던 시기였기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황인종'과의 전쟁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러시아의 패배로 끝나고 이 실패한 전쟁에서 유독 제물포 해전은 러시아인들에게 '영웅적'으로 찬양 되었다.
제물포 해전의 전개 과정은 간단했다. 당시 중립 항구인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장갑 순양함 바랴크 호와 포함 코리예츠 호에 대해 일본 해군은 퇴거를 요청하였고, 이에 결사항전을 벌리기 위해 두 함선은 팔미도에서 치요다를 포함한 일본해군 10척을 맞아 40분 동안 교전을 벌리다 중과 부적으로 결국 자침하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이었다. 이 전투를 전후로 일본은 무단으로 인천에 상륙하여 조선을 점령하였고 한반도에서 우위를 가져갈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인천 조계지와 중립 항구 인근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여러 목격자들이 있었다. 우선적으로 현재의 자유 공원 인근 일본 조계민들은 양 국 간의 함대 교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고 일본 함대가 승기를 잡자 이들은 당연하게도 만세를 불렀다. 그 외에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영국의 탈봇, 프랑스의 파스칼, 이탈리아의 엘바, 미국의 빅스버그 등 타국 군함들에 승선해 있던 선원들 또한 이 장면들을 지켜 보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패배한 러시아군 수병들과 선원들은 당연히 포로로써 억류되었고 일본에서 포로 생활 후 다시 러시아로 송환 되었다. 당시 러시아 황실과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 되던 민중 상황을 볼 때, 제물포 전투의 패잔병들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반응은 미지근하거나 도리어 적대적이었을 것 같으나, 예상과는 다르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환영하는 러시아인들의 논리는 이러했다. 러시아는 두 척이라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 하고 일본의 열여섯 척을 상대로 양보 없는 결전에 임했기 때문에 ‘용감한 방어 전’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 해군은 선전포고 없이 기습하는 '비열한 짓거리'까지 저질렀는데 러시아 해군은 그것에 용감하게 맞섰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이런 생각을 가졌는데 니콜라이 2세는 이들을 치하 하며 “여러분이 보여준 영웅적인 용기는 우리 러시아 함대의 역사에 새 페이지를 장식했다”고 하였고 바랴크와 코리예츠 두 함명을 계속 승계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실제 이 두 함명은 지금도 러시아 해군 소속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
아무튼 이런 시각은 패배에 대한 민중들의 시선을 희석 시키는 동시에 다분히 인종주의적인 색채 또한 강하게 가미하고 있었다. 이런 풍조는 러일 전쟁으로 인해 백인 우월성에 충격을 받은 다른 서구 국가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당장 제물포 해전을 목격했던 각국의 백인들의 증언 또한 이런 시각을 강화 시켰다. 이들은 "바랴크함에서 만세 소리"와 "러시아 국가"가 울려 퍼졌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더해 프랑스에서는 귀국하는 제물포 해전에 참전한 러시아 선원들을 인터뷰하고 이를 한데 묶어 [제물포의 영웅들]이라는 르포집까지 발간할 정도로 당시 제물포의 러시아 병사들을 영웅시하는 풍조는 서양인들 사이에서 만연해 있었다. 해당 서적은 현재 한국에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국가 간의 이해관계와 상관 없이 러시아의 패배는 서구 사회에서는 '황인종'에 대한 '백인의 패배'로 광범위하게 받아 드려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불어 '선전 포고 없이 공격하는 야비한 일본인'이라는 이미지도 처음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물포 신화'는 러시아 내에서 오래 살아남아 사회주의 체제의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한 이후에도 영상, 공연,동상 등 각종 콘텐츠로 제작되었다. 현재에도 러일 전쟁 100 주년을 기점으로 '강한 러시아의 상징'으로 이를 크게 부각 시키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푸틴은 '애국심고양사업위원회'를 만들고 국가주의적 행보를 이어가면서 철저하게 이를 이용하고 있다. 푸틴 스스로도 바랴크호 깃발 순회 전시를 독려하거나 인천에 러시아 수병 추모비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인천광장'에서 안드레이 카진 러시아 상원의원은 "러시아의 한국 진출과 러일전쟁은 한국을 일본에서 구하기 위한 지원이었다"는 문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런 세태는 전적으로 러시아인들에게 '강한 러시아'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동북아 지역에 대한 관심을 고양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 만약 동북아, 미국과 중국의 긴장 사이로 러시아가 개입할 경우, 러시아인들은 제물포를 먼저 떠올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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