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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거리 모습

by 바스통 202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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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대전 발발 직후 각국의 민중들의 모습은 마치 열광과 기고함에 혼재된 도가니였다. 모든 사람들아 거리와 광장에 모여 마치 신탁을 받는 듯한 모습으로 선전포고에 열광하는 모습들은 도저히 근대적인 인간의 합리적인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어느 국가의 국민도 이런 광신적인 열광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이것은 19C 근대 사회의 형성이라는 이름 저편에 생긴 각국의 국민들에게 암묵적으로 인정되어진 공통된 인식인 동시에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우리는 이를 '전쟁낭만주의'라고 부른다. 

 흔히 이런 전쟁 낭만주의를 장시간 평화 시기에 따른 안보적 인식 해이 혹은 전쟁에 대해 뭘 모르는 인식 부족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주요 참전국의 국민들이 심지어는 파리에서 자신의 동원 소집일과 순서를 가지고 아침 인사할 정도로 또 베를린에선 칸토레크 선생이 고대 게르만족의 신화와 영웅들까지 들먹이면서 찬양을 늘어놓는 모습은 이것이 단순한 명상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사회적 인식의 문제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지난 세기였던 19c의 유럽은 키신저가 언급처럼 "주요 전쟁이 없이 가장 오래 지속된 국제체제" 위에 세워졌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럽 공간을 이전과는 다른 유래 없이 안정적인 곳으로 바꿔놓았다. 1789년 대혁명을 거쳐서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 각국으로 하여금 반동적인 평화를 지향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이런 평화는 빈체제의 반민주적인 반동이 종말을 고한 이후로도 다른 형태의 체제로 대체되어 1914년까지 유지되었다. 이런 이유로 19c 유럽의 전쟁 기간은 18개월(칼 폴로니의 <위대한 전환>, 물론 이는 1944년의 연구결과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하지만 분명 이전 전쟁 등과는 달랐다는것은 인지할 필요가 있다.)로 이는 유럽의 전쟁이 몇년 혹은 몇 십년을 지속하던 전 세기와 비교했을때 비교할 수 없는 단기전이었다. 이와 동시에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은 유럽과 주변지역의 제해권을 선점하고 남아프리카를 포함한 다수의 해외 식민지를 가지게 되었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북이탈리아의 일부와 라인란트를 획득함므로써 중부 유럽 패권을 강화시켜나갔다. 물론 전간기의 빈체제는 '평화를 구실로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었고 이를 기반한 신성동맹 또한 각 국가가 반동으로 가지는 대내외적 균형을 위한 방책을 시도하였으나 1830년과 1852년을 거치면서 무너져내릴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마치 1793년 칸트의 <영구 평화를 위하여>에서 말한 '여론이 정치를 주도하고 상업주의적이며 이성적인 공화국들이 경제적으로 상호 의존하고 전쟁을 기이할 것'이라는 견해를 실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칸트의 <영구 평화를 위하여>에서 말한 상업주의적인 동시에 평화지향적인 공화국의 등장과 확장은 결과적으로 빈체제 이후의 19c 전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다. 비록 초기에 빈체제는 이런 물결을 막기위한 반혁명을 기치로한 공동의 국가집단 체제을를 구성하였지만 이 미약한 결속 곧 무너졌다. 이 결과 만들어진 불확실한 외교적 상황은 곧 유럽 각국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맹을 맺는 협조 체제로 대체했으며 이 이행과정에서 벌어진 두번의 충돌은 단기전으로 마무리되었다. 또한 혁명전쟁과 산업혁명의 여파는 유럽 국가들에 혁명사상에 따른 국민국가와 공화국의 형성과 경제적 통합을 강요하고 있었다. 헌정 체제의 발전은 공화국 내외에서 평화로운 영리활동을 보장하였고 국가 간의 무역과 경제협력이 증가했다. 그 결과 국가들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이해관계에 따라 묶이게 되었다. 

 유럽의 협조체제는 세력균형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국가 팽창으로 국가 간의 권력 배분의 현 상태를 깨려한다면 동맹 체제의 재편으로 이를 방지하였으며 분쟁의 요소가 약소국에 있다면 중립화하거나 아예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는 강대국들에 외교적 집단 압력을 통해 이를 방지하였다.(오스트리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 영프의 태도가 여기에 속한다) 이런 긴장 관계는 공화주의의 유산인 국민 개병제와 산업주의의 유산인 군사기술의 발달과 어우러져 언제나 상대보다 우위의 군사력을 강요하였다. 이와 동시에 대외적인 균형과 더불어서 대내적으로는 결속 또한 중요한 문제였는데 이는 신성 동맹에서 부터 이어져오던 각국의 왕족이나 귀족 간의 혼인과 국제적으로 연계되어진 금융은 이런 내적 요소들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랬기에 1871년부터 1914년 대전 전까지의 무장 평화 상태가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안정적 유럽 공간은 결국 유럽 내적 팽창보다는 유럽 외적 팽창을 가속화하였으며 당시에 전쟁이란 곧 유럽 외적 공간에 있는 식민지에서는 싸움을 의미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의 평화 상태가 '무장평화'였다는 점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언제든 평화 상태는 전시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평화를 지향한다는 공화국과 이를 다스리는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인간과 무장과 전쟁이 과연 양립할 수 있을까? 당시 지식인들과 대중들의 답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근대적인 의미에 평화의 사상적 발원지이기도 한 17세기 독일에서 이와 동시에 전쟁주의에 대해 논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상적인 점은 반혁명주의자들은 물론 칸트와 피히테와 같은 공화주의자들이나 공리주의자인 스튜어트 밀 등도 전쟁을 문명적 진보의 촉진제로 평가한 점이었다. 밀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추한 것이지만 가장 추한 것은 아니'었다.(원문 War is an ugly things, but not the ugliest of things. The decayed and degraded state of moral and patriotic feeling which thinks that nothing is worth war is much worse. The person who has nothing for which he is willing to fight, nothing which is more important than his own personal safety, is a miserable creature and has no chance of being free unless made and kept so by the exertions of better men then himself -John Stuart Mil-) 비록 공화국이 평화를 지향한다는 것에는 논란이 없지만 공화주의가 특권 계급에대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전쟁과 같은 폭력들은 곧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행위로써 혁명을 이루는 일종의 도구로서 간주되었다.(이는 과학적 공산주의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말한 국익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전쟁관은 국가 간의 관계에서 최후의 강요 수단으로 전쟁을 합리적인 것으로 편입 시켰다. 곧 유럽 각국이 평화 속에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무장을 강화하는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이런 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유럽 안에서 드물게 벌어진 전쟁과 식민지로부터 표출될 기회를 얻어 유지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기술적 진보는 전쟁을 '할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철도에 따른 병력 이동과 보급의 유용, 후장식 총의 등장 등은 합리적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어우러져 문명인들 간의 전쟁을 단기적이고 속전속결로 끝나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모니터를 통해 전쟁을 게임처럼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동시에 기술적 우위는 문명 외의 공간에서 야만인들에게 유럽인들의 힘의 우위를 상징하는 요소였으며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낭만적인 원동력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비교적 평화로운 이 당시에도 싸울 의지와 능력이 있는 자는 문명적인 의지를 상대에게 관철할 수 있는 진보적인 인간으로 간주되었다. 문제는 현대의 우리와는 다르게 당시 유럽인들은 정보를 습득하는 통로는 제한적이었으며 이는 곧 왜곡 된 사고를 고칠 수 없었다는데 있다. 

 결과적으로 근대 사회에서의 평화에 대한 낙관과 전쟁의 양립은 모순적이지만 전혀 모순적이지 않은 형태가 되었다. 더욱이 영구 평화의 근거인 합리적인 인간과 공화국을 형성하는 도구로써 전쟁이 이해되면서, 이의 유산인 근대 국가에게 전쟁은 합리적으로 행사되는 권리로써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합리적이고 평화를 지향하는 근대 국가 간에 전쟁은 발생할 가능성이 적으며, 설사 발생하더라도 이는 합리적인 그리고 기술적인 이유에서 단기전이 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대중적 공감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근대 유럽의 외교적 환경과 단기전으로써 증명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는 곧 전쟁을 긍정하는 태도를 강화시켰다. 이천 전쟁에 대한 견해들은 곧 합리적인 이성의 집합인 국가와 어우러져 전쟁 행위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만들었고 그 신뢰감은 질서론적인 균형이 깨진 참전국 대중들에게 즉시 전쟁을 자극하는 촉매가 되었다. 

 더욱이 이런 전쟁에 대한 견해들은 국민 개병제라는 국민으로서의 자의식과 명예가 군인의 의무감에서 비롯된다는 관점이 공감대를 얻으면서 더욱 대중들 속으로 파고 들었다. 국민개병제는 국가의 남성과 시민,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병영생활을 통해 강력하게 결속시켰고 그 구성원들에게는 '모든 시민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적을 무찌르는' 전쟁의 낭만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 결속에서 예외는 없었다. 또 근대 국가의 시민병의 표상으로써 자신의 용맹한 행동을 곧 자신의 사회적 권리 획득의 근거로 바라본 참전자들의 이데올로기는 젊은이들을 광적으로 모병소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당시 광장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의 감정을 요약하자면 장기간 안정을 유지하던 세력 균형 체제가 깨지자 그들은 이전 부터 공화주의와 평화로는 속에 남아있던 전쟁에 대한 낙관적 낭만이 불타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세대에게 전쟁은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 인식하였고, 이를 국가가 보장하는 시민 권리와 직접적인 인과관계 속에 놓인 현상으로 인식하였다. 모든 참전국의 대중들은 이런 감정적인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평화를 지향한다는 공화국의 이상적 시민이 전쟁을 외치는 것은 모순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관념에 비추었을때 매우 합리적인 논리에 따른 결론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균형이 깨진 유럽에서 대중들은 손쉽게 전쟁을 요구했고 이에 대해 공화국들은 설사 그 외형이 군주국이라 하더라도 이를 제동할 수 있는 힘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선 안되는 사실은 이성이 지향하는 이상과 이성이 만들어낸 현실의 차이가 크면 클 수록 대중들이 받는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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