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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관동군 한인 징병

by 바스통 2021.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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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관동군은 주력 병력이 본토 결전과 남방 전선에 순차적으로 투입되었기 때문에 실제 전력은 형편이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인력이 절대 부족하였는데 관동군은 이를 만주 국 내에 있던 일본인과 조선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강제 징집을 실시하여 채우고 있는 실정이었다.

 

 조선인의 징병과 군속 배치 자체는 특이한 것은 아니다. 이미 1938년에는 지원병으로, 1943년에는 학도병으로, 1944년에는 징병제를 통해 관동군에 배치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45년 이후에는 거류민들 중에 말 그대로 인력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아 징집을 하였다. 그 면면을 보자면 일반 거류민 농민부터 만주국 공무원, 남만철 직원, 교원 등등으로 각계각층에서 15세에서 50세 사이에 남성들을 주 대상으로 잡아갔다. 

 

 이렇게 갑자기 끌려간 만주 거류 조선인들은 길림성에 있는 육군 훈련소에 2개월 간 군사훈련을 받은 이후 하얼빈을 통해 대부분이 북만주 손오 지역에 배치되게 된다. 이는 한인 소련군 포로 귀환자 단체인 '시베리아 삭풍회' 회원들의 다수가 손오 혹은 북 손오 지역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 하는데 단순하게 조선인 관리 차원에서 한 지역에 모아서 배치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1945년에 이전에 한반도와 만주에서 징집 된 조선인들과는 다른 지역에 배치 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렇게 징집 된 조선인 군인과 군속들은 당연히 소련군과의 대치와 교전도 강요 되었다. 이들은 대전차호를 파거나 지뢰를 매설하는 등의 작업에 동원되거나 혹은 탱크 등에 뛰어들어 자폭병으로 옥쇄하는 훈련을 받았다. 

  

 8월 8일 소련군이 침공해오자 이들 부대 또한 소련군에 맞서 일전을 치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전투는 물자 부족 등으로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특히 앞서 말한 손오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 부대는 병력이 3만명 가량 되었지만 대전차 무기 조차 제대로 배치 되지 않았던 말 그대로 유명무실한 부대로 제대로 소련군과의 전투를 치를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게 되자 조선인들을 포함한 관동군 전체가 무장해제 되고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관동군에 배속 된 조선인 군인과 군속의 전체 수는 추정으로 4만에서 5만 명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본 정부가 가진 명부로 확인이 가능한 수는 1만 8천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전체 관동군 소속 조선인 중 소련군의 포로가 된 인원은 대략 1만 명 내외로 보인다. 전체 대비 조선인 포로의 수가 적은 이유는 앞에 언급한 손오 지역 부대를 포함해 주로 북만주 지역 관동군 부대에 배치 되었던 조선인들의 경우만 소련군의 포로로 억류 되었고, 남 만주 혹은 동 만주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 부대의 조선인들은 소련군을 피해 빠르게 남하했거나 혹은 종전 이후 포로 억류 없이 대부분이 고향으로 귀환하였기 때문이다. 소련군에 포로로 억류 된 조선인 중 극소수는 탈출하였지만 대부분은 남아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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