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소련이 일본을 공격함으로써 미소 간에 있던 미묘한 긴장 관계가 가시적인 대립으로 표면화 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스탈린이 원하던 일본 분할 점령 통치에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소련의 대일 참전은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의 동북아 진출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적 영향력을 가지게 하였으며, 일본 훗가이도 근해와 베링 해협을 연결한 해양 경계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는 미국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팽창 정책을 저지해야 하는 주도적 위치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런 전략적 변화로 인해 미국은 장차 직면 할 소련 팽창 정책에 맞서기 위해 극동 지역에 방위 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도서방위전략'으로 불린다. 이는 핵무기 사용을 전재로 한 전면전의 개념이었는데, 정확하게 베링 해의 알류산 열도를 시작으로 일본,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도서 방위선 상에 있는 해군, 공군 기지를 활용하여 전략 공군과 핵무기를 사용하여 전쟁을 수행한다는 일종의 핵만능주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만약 소련이 전면전을 시작 한다면 최초에는 수세적인 자세를 취하다 태평양 지역의 기지에 있는 해군 공군을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도련선에서 격퇴한 후 공세로 전환하여 아시아 대륙으로 공격한다는 것이 기본 계획이었다.
이런 방어 개념은 최소한 1947년 중반부터 미국의 대소 계획에 반영 되었다. 이 계획의 중심에 있던 맥아더는 이 개념에 대해 미국의 방위전은 "미국 서부"가 아닌 "아시아 극동"일 것이며, 이것은 알류산 열도-미드웨이-마리아나 군도-필리핀을 연결한 U자형 선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에 오키나와의 공군 비행장은 전진 기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하여 이들 선은 미국 국방의 최전선으로의 성격을 명확히 하였다. 동시에 아시아 대륙 방어의 해군력과 공군력의 거점으로써 활용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미국에게 최소한의 비용으로 서태평양지역을 방위를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동시에 전략적 항공 작전을 실시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국무장관이 발표한 소위 <애치슨 라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미국의 극동 방위 전략으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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