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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1차대전기 미국과 일본의 충돌

by 바스통 2021.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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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 유신 이래로 일본은 만주와 대륙 진출에 국가의 사활을 걸었다. 그리고 1차 대전 참전의 결과로 일본은 대륙 국가로써 중국으로 국익을 확장 할 수 있는 완전한 발판을 마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북진' 정책은 이전 부터 여러 가지로 현실적인 제약이 많았다. 우선적으로 중국은 서양 제국들의 세력 범위와 이권이 복잡하게 뒤섞여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이들의 입장에서 일본의 진출은 달가울 리 없었다. 특히 일본이 관심 가지던 만주와 몽골은 서구 열강들도 주의 깊게 관심을 가지는 문제였기 때문에 이권 확보가 쉽지 않았다. 또한 러일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특권들은 조약 상 근거가 약하거나 애매하였다. 이것은 곧 바로 '삼국 간섭'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1915년, 1차 대전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 참전으로 얻은 이권을 다시 그런 형태로 빼앗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런 현안들을 일본은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통해 단번에 해결할 생각이었다. 이것은 중국의 저항은 물론이고 중국의 독립적 상태가 자국의 이익과 직결된다고 보고 있던 미국의 반발까지 촉발하였다. 미국은 중국의 독립이 중국 내 서구 제국 간의 세력 균형을 맞추어 후 발 주자인 미국의 중국 진출이 용이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니 이런 세력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본의 돌출 행동에 반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미국의 반발은 곧 바로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다. 유럽 각국이 1차 대전에 몰두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입장은 서구 국가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 국내 또한 유럽 전선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던 만큼 큰 관심을 끌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일본은 당시 영국과 동맹국이므로 중국 내 미국의 이권을 위해 영국과의 대립까지 무릅쓰고 일본과 충돌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미국은 중국이 21개조항에 대해 일본의 최후통첩을 수락하기로 결정하자, '중국의 독립'을 훼손하고 '문호개방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조약은 반대한다는 통고만을 발표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렇게 봉합 되는 것처럼 보이던 이 긴장은 이후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1차 대전 초부터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돌연 유럽 전선에 참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에서 미국과의 대립 관계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하였다는 것은 유럽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 배치 된 미 육군과 미 해병대 병력의 재배치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여차한다면 일본의 이익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일본이 느끼기엔 충분하였다. 더구나 그 이후 미국의 외교적 행보 또한 일본을 자극하기 충분하였다. 미국은 중국 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중국의 참전을 유도하여 결국 1917년 8월 14일 중국은 대독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중국은 강화 회의에도 초대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노골적으로 일본을 견제하는 외교적 행보였다. 

 

 그러나 곧 이 참전 문제로 인해서 참전을 반대하던 중국 의회 내 의원들이 손문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광둥 정부를 수립하자 중국은 북경 정부와 광둥 정부로 양분 되어 대립하게 된다. 이에 일본은 이 기회를 활용하여 북경 정부를 지원하여 미국의 개입을 봉쇄하는 한편 외상 이시이를 통해 미국과의 타협을 시도하게 된다. 미국 또한 유럽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서 일본과의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을 피하려 하는 입장 변화가 있던 터였다. 이런 미일 간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1917년 11월 2일 이시이-랜싱 협정이 체결 된다. 

 

 이 협정은 일본의 중국 내의 '특수 지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중국의 '문호 개방'과 '영토 보존', 양국 간 '기회 균등'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당연하게도 일본은 이것이 미국에 대한 승리라고 생각하였고 전자인 '특수 지위'에 집착하였고, 미국은 후자인 중국의 '문호개방・영토보전・기회균등・주권존중'에 더 무게를 두었다. 이를 통해 일본의 중국 진출을 억제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하나의 협정에 대한 양 자 간의 다른 해석은 모순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당연히 중국은 조약 직후 대대적인 반발했지만 무시 되었다. 이 협정 이후로 일본은 이 '특수 지위'를 이용해 반공 조약을 체결하는 등 대륙 진출에 더욱 가속도를 붙였다. 미국은 1922년 이 협정을 대체할 9개국 조약으로 중국 내 '문호개방・영토보전・기회균등・주권존중'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결국 이런 애매한 양 국 간의 평행선은 1920년대 계속 유지되었으며, 결국 만주 사변을 기점으로 폭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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