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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영국의 냉전 초기 한반도 인식

by 바스통 2021.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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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냉전 직후의 영국의 한반도 인식이 미국 중심의 전후 질서에 대한 반발이었다면, 냉전 초기 특히 한국전쟁 기간 중 영국의 한반도와 대한(大韓) 인식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영국은 유엔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영국군과 영연방군을 파병하였지만, 이는 소련이 동북아 지역에 개입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인식을 미국과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틀에서 미국의 극동 정책에 대해 영국은 쾌를 같이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면서 영국은 미국과의 입장 차이를 노출하게 된다. 사석에서는 '미국의 극동 정책이 소련보다도 영국에 더 위협적일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영국에게 홍콩은 극동에 남은 유일한 거점이라는 점에서 영국이 느끼는 부담은 컸다.

 

 당시 영국에게 있어 홍콩은 극동의 거점이자 해방 구였지만, 반대로 언제든 중공군이 침략할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중국 공산당이 1949년 이전에 체결 된 모든 조약 중 중국에 유리한 조약을 제외한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할 것이라고 천명한 상태에서 조약 상 홍콩의 위치는 매우 불안정했다. 그렇다고 소위 '신중국' 이후의 중공군을 영국이 군사적으로 격퇴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영국의 대중 정책은 불안한 '타협'이었다.

 

 이런 배경은 중국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정책 차이에서 명확해진다. 중국 공산화 이후 영국은 중공 정부를 승인하였지만 미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 이후에도 영국은 중국과의 교전을 부담스러워 했으며, 미국이 만주를 공격하여 확전 되지 않을지 불안해 하였다. 결국 영국의 수상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직접 미국이 '만주에 핵 공격'을 할 경우, 소련이 '유럽에 핵무기를 사용한 보복' 할 수 있기에 중국과의 확전을 자제해야 한다는 권고를 직접 하기에 이른다. 

 

 이런 배경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그대로 이어져 미국과 영국은 각각 대만 정부와 베이징 정부 중 어느 정부를 강화 조약에 승전국으로 초청해야 하는지 갈등 하였고, 결국 아무도 중국 대표로 초청 되지 않는 촌극이 벌어진다. 

 

 이렇듯 영국은 한반도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만큼 영국의 한국과 한반도 정책과 인식은 대체적으로 타 국가의 정책에 종속적으로 반응한다. 이런 수동적 한반도 정책은 소위 한반도를 둘러싼 4강국을 제외한 강대국들의 극동 정책에 대한 동인을 분석할 때 언제나 상기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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