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어떤 분께서는 김첨지 인력거 보급으로 시베리아를 정벌하는 꿈 같은 예기를 하신적이 있을겁니다. 솔직히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라서 열심히 반박은 하긴 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아주 틀린 예기는 아닙니다. 물론 시베리아를 점령하는 것 자체는 말그대로 꿈 같은 예기지만 인력거 보급이 없었던 것만은 아니었으니 말이죠. 물론 김첨지가 아니라 왕서방이 끌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입니다.
아무튼 중일 전쟁 개전 시점에서 일본군 행렬 모습은 간혹 군대의 행군행렬이라기 보다는 마치 어떤 토착 집단의 대이동과 같았습니다. 당시 일본군의 초대로 상하이 전선을 시찰했던 주일미국대사관 소속 재무관이었던 해리 그레스웰 소령은 일본군에 관해 본국에 아래와 같은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이들 보병부대 행군의 기묘한 특징은 병사의 개인 장비를 옮기기 위해 거의 모든 종류의 운반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운반수단의 범위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즉 유모차에서 인력거, 창고에서 상자를 옮기는데 사용하는 두개의 손잡이가 붙은 낮은 짐차, 그리고 동양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람의 힘으로 끄는 보통의 이륜차(리어카)까지 이다"1
이들이 이렇게 여러가지 운송 수단을 이용해 옮기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지급된 군장이었습니다. 사실 그레스웰 소령이 목격한 장면은 얼핏보면 매우 한가한 모습이었습니다. 전장에 유모차를 밀면서 행국하는 모습은 살벌함과는 거리가 먼 아이러니한 장면이니 말이죠. 하지만 내막을 들려다 보면 사실상 이것은 비극이었습니다. 1937년 당시 상하이 파견군에 소속 되어있던 일본 제 10군의 법무부장의 12월 11일자 일기에는 당시 일본군 행렬에 대해 일본군 병사들이 '중국인을 징발하여 자신의 군장과 철모, 총(?!)까지 지게'하고 '그 수가 심한 곳은 병사들 수만큼 데리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고 썼습니다. 물론 '명령에 그대로 따르지 않고 조금이라도 거부하면 즉시 죽게 되고, 만일 도망가거나 주변을 어슬렁 거려도 죽게'되기 때문에 '결국 하라는데로 움직이는데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고 덧붙여서 '마치 일본군의 행군인지 중국 토착민의 행렬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때가 있다고 묘사하였습니다. 결국 이렇게 중국인을 연행해 데리고 다니면서 행군하는 것은 중국 전선에서 일상화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당시 일본군은 철모, 배낭, 야삽, 소총, 총검 등 완전군장의 무게는 대략 25kg이었습니다. 여기에 탄약과 자기가 먹을 쌀까지 지게 되면 30kg을 훌쩍 넘기게 됩니다. 도쿄대의 울산 달리마을을 조사한 '농촌위생조사보고서'에서 1932년 일본 농촌 남자의 평균 몸무게를 53kg, 일본 전체 남자 평균 체중을 52.7kg이라고 한 것을 감안한다면2 아무리 잘 봐줘도 자기 몸무게의 56%의 무게를 지고 가는 꼴이었습니다. 이는 1차대전 당시에 영국군 병사 한명이 자기 몸무게의 45% 내외의 무게(당시 영국 남자 평균 체중 59kg, 영국군 하계 완전 군장 27kg3)를 짊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이조차도 상당히 무거운 축에 속합니다) 이는 평균 체중이 1932년 자료라는 점을 감안해도 많이 잡아봐야 25kg 내외가 한계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군장의 부담은 태평양전쟁이 개전 되고 또 장기화 될 수록 심해졌습니다. 제공권이 장악당하면서 보급로가 끊어진 덕분에 그만큼의 보급소요를 병사들이 직접 날라서 행군해야했는데 예를 들어 1942년 포트모르즈비 공격을 위해 행군했던 남해지대의 경우는 각각 쌀 16일치에 1회전 분량의 탄약 등등을 지게로 지고 보병이 행군함으로써 1인당 40kg~50kg을 부담하였습니다. 임팔작전 당시의 상황도 비슷해서 임팔에 투입되었던 제58연대의 경우는 쌀 20일분등 최소한 병사 한명당 1인당 40kg 이상을 부담하여야 했습니다.
이는 당시에 독특하고도(시대에 한참 뒤떨어진인) 일본군의 전시 급식 체계의 구조적 결함도 한 몫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1차대전을 기점으로 서구의 군대는 취사반이 배치되어 병사들에게 후방에서 전선으로 밥을 제공하는 방식이 일반화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경우는 그때까지도 밥과 밥솥을 휴대하여 병사들이 야전에서 직접 취사하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일본군의 완전군장에는 자기가 작전기간 동안에 먹을 쌀과 솥을 그대로 휴대할 수 밖에 없었고 전쟁이 장기화 되고 보급이 열악해질수록 그 부담이 커진 것이었습니다.(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시중에 파는 5kg짜리 쌀가마니 하나를 이고 행군한다고 생각해보라, 당시 일본군의 전시 급식 기준으로 20일치 쌀은 18kg정도였다.) 게다가 병사들은 취사 행위때문에 제대로 휴식할 수 없었으며, 기본적인 식사 준비를 위해 연료를 충당하러 민가를 파괴하거나 가재도구를 약탈하고 더 나아가서는 쌀과 부식물을 더 얻기 위해 약탈을 감행하면서 말그대로 주둔지 주변을 자연스럽게 초토화를 시켰기 때문에 중국인들로 부터는 메뚜기 군대라는 이름의 蝗軍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이 마냥 대책없이 보병부대 개개인의 각력에만 의존하였느냐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보병 연대에 배속되어진 포 종류들과 중화기 그리고 통신 장비와 보급품 운송에 주로 군마를 사용하였고 각 전선마다 필요한데로 낙타나 물소 등을 이용해 운송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1941년 육군 동원 계획령에서 갑편제의 보병 연대의 총 인원 5546명에 군마 1242마리가 배속되었습니다. 일본군의 연대 전력에서 중화기가 얼마나 배속되어있고 이를 끄는 마리수가 얼마나 되어있는지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단순 숫자로만 놓고 봤을때 독일군의 군마 소요와 엇비슷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치중부대라고 불리는 보급 부대로 이 경우에는 대대 기준으로 만마4 1개중대와 자동차 1개 중대로 혼합편제를 한다고 개편한다고 하였지만 이는 평시 편제일뿐 전시 동원편제 상에서는 여전히 군마와 가축에 크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이후 중일전쟁으로 인한 군비 확장 과정에서 만마를 자동차로 대체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대다수의 차량들은 민간에서 징발 되어진데다 애초에 일본 국산 자동차의 생산 능력 자체가 워낙 낮았기 때문에 적절한 수를 징발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 자동차 자체의 성능일 떨어져 고장이 잦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육군 대신의 승용차도 육군자동차학교가 연구 명목으로 구입한 고급 외제차를 전용하여 사용하다가 1939년 육군자동차학교장이 육군대신에게 국산차를 이용하라고 항의하자, 육군성이 "대신은 폐하를 모시기 때문에 만일 사고나 나면 송구하므로 이것은 역시 국산차가 아니고 외제차여야 한다"고 회답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덧붙여서 일본도 야전 취사차를 생산하긴 했지만 결국 이를 일선에 배치하지 않았고 여전히 병사들 개개인의 취사에만 의지하였습니다.
이는 독소전에서 독일군의 군마 운용 사례에 빗대어 보자면 전술적으로 적의 공습에 취약하였고 공세 중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물과 사료를 소비하였으며 질병에 취약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문제였습니다. 당연히 공세 중에는 충분한 양의 보급을 받지 못하고 공세 진행에 따른 과로로 인해 최악의 경우 폐사로 인한 소모도 크게 고려해야 했습니다. 만약 시베리아였다면 극심한 기온차라는 극악적인 요소까지도 겹쳤겠죠.
결론적으로 당시의 일본군은 지나치게 무거운 군장 시스템과 구시대적인 전시 급식 시스템 그리고 그에 발 맞춘 심각하게 낮은 수준의 기계화로 인한 구조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곧 일본군 자체의 발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모분의 말처럼 아무리 김첨지가 날고 기어서 인력거가 날아다닌다 한들 시베리아 벌판에서 얼어 죽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출처 일본의 군대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P.S. 흠 오랜만에 쓴 것 같은데 정리가 안된 뻘글이네요;;; 죄송합니다
P.S.2 아오 한 문제 때문에 자격증 떨어지니 괜히 열받는군요 (ㅡ=ㅡメ)
- Correspondence of the Military Intelligence Divison Relating to General, Political, Economic and Military Conditions in Japan 1918-1941, Washington D.C, 1983
- 울산 매일, 1936년 울산 달리展’으로 본 울산의 사회·경제상 <7>결혼과 임신·체격 상태
- 참호속에 갖힌 1차대전
- 짐마차를 끄는 말이라는 의미 반어인 등짐을 지는 말은 태마로 분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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