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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반자이 돌격-백병주의와 정신주의가 만들어낸 광기

by 바스통 2020.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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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O 미니 시리즈 [퍼시픽]에서 '일본군이 너무 바보 같아요' 라고 하는 예기가 다른 사이트를 통해서 많이 들려 오더군요. 그 이유는 잘 아시겠지만 이름하여 만세돌격으로 미군의 총알에 곱게 쓰러져 주시는 일본군 엑스트라들의 의해서 인데 덕분에 한분이 졸지에 람보영화라고 욕을 먹고 있죠 그래도 실제로는 MOH까지 받으신 분인데 말입니다. 그때문에 이 반자이 돌격이라는 것에 대해서 집고 넘어갈까 합니다.

 

 [퍼시픽]을 포함하여 미군과 일본군이 나와서 싸우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한번씩 나와 주시는게 바로 이 반자이 돌격일겁니다. 정상적인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화려한 자살 임팩트와 착검 및 일본도를 든 인간 웨이브는 가히 충격(?)적이면서도 한편으로 미소(?)를 띄게 만드는 장면입니다. 이제는 세계적으로 일본군의 삽질의 전형이 되어버렸는지 타국 사이트까지도 Banzai attack 혹은 Banzai charge라는 이름으로 타국에서도 까이더군요. 그렇다면 이런 후덜덜한 파워 개돌 러쉬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단지 일본군이 멍청해서? 아니면 천황폐하에게 정말 감복스러워서? 우리는 이 희대의 삽질에대해서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해 좀더 정확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들이 왜 반자위를 외치며 일본도를 휘두르게 되었는가-일본의 백병주의

 

 일본이 유신을 하고 군대를 창설할 당시 일본은 정확한 신식 육군 양성에 롤모델이 존재하지 않아 무지하게 애를 먹고 있던 실정이었습니다. 그러다 열강 유럽에서 그 롤모델을 찾았는데 그것이 당시 보불 전쟁으로 한창 뜨고 있었던 독일의 육군 교리와 전술 사상이었고 이때에 화력주의와 기동전 논리가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화력주의란 소화기와 포망을 한곳에 집중 시킴으로써 적을 압도하고 백병전보다는 화력에 의해 승패가 갈린다는 사상으로 당시 육군대학교 교관으로 있던 멕켈 소령등의 영향이 컸습니다. 때문에 당시 일본 육군의 1891년 교범은 이런 독일의 사상을 거의 카피하다 싶이 담고 있었으며 청일전쟁 이후 전훈에 대한 개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내용이 거의 동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화력주의에 대한 신봉을 여지 없이 무너뜨린 것은 바로 러일전쟁이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여순 전투를 진행했는데 그것에대한 교훈 자체가 상당히 빗둘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서방 세력들은 이 전투를보고 중기관총과 보병 지원용 중포의 개발과 대량 배치가 육군 전력 증강의 주요 내용이 되었던 반면 일본군은 화력주의에대한 불신이 팽배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데 우선적으로 일본군에서의 포탄과 총탄 생산이 소비량을 따라잡지를 못할 정도로 급증하여서 몇번의 전투를 거치면서 모든 포탄과 총탄의 재고가 바닥을 쳤으며 당장 포병 화력이 적병력을 제압하는 것이 부족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본군은 이 경험으로 나라 전체의 모든 병력을 쏟아 넣은 터라 나라가 휘청할 뻔한 상황이었음으로 불신이 나올만한 것이기는 했습니다만 이것은 수뇌부의오판이 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순 전투 당시 일본군의 포병력은 정확한 사격이 불가능할 정도로 난잡했으며 심지어 육군은 알력 다툼으로 해군의 지원 포 사격조차 거부하는 객기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물량의 소비량과 적에대해서 정확히 파악하지도 못했을 뿐더러(사실 러시아군은 당시 프랑스의 육군 교리를 적극 받아들여 오히려 적극적으로 백병전을 걸어들어왔습니다) 사령부조차 먼거리에 있어 정확한 전장 파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엄청난 피를 뿌린 것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203 고지의 경우 3군 전체를 거의 모든 병력을 투입하여 100일 넘게 돌격전을 벌려 거의 모든 병력을 소진한데 반해 마지막 7사단의 경우 정확한 화력 엄호 속에 러시아군의 포병력을 확실하게 제압함으로써 작전 개시 5시간만에 203고지를 점령해버린 상황에서의 수뇌부의 화력주의에 불신을 가진다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로 인해 러일전쟁 이전의 교범에서 '전투는 집중 화력의 의한 제압에의해 이루어지고 백병전은 잔적 소탕 혹은 점령진지의 입성시에 행해지는 것'이라는 정의를 이후에 개정에서는 '백병전은 전투의 우선이고 사격은 이 백병전을 치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정의해버립니다. 여기에 일본 민족은 백병전에 유리한 민족이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여줍니다. 물론 일본은 러일전쟁과 1차대전 이후 군축과 전훈 사이에서 어느정도의 군 근대화에 성공합니다만 이 근대화라는 것은 '불완전한 근대화'였습니다. 바로 본격적으로 정신주의 백병전 논리가 퍼지기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일본이 아시아의 섬나라라는 특수한 특성(1920년대 일본을 상대로해서 1급 수준의 정규군과 전투를 벌릴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과 일본의 부족한 공업력과 전비(여전히 일본의 공업력은 크게 딸렸는데 서방의 동급의 구경의 포라고 하더라도 일본쪽의 무기가 훨씬 신뢰성면에서 딸렸던 것이 사실이며 또한 여전히 탄이나 포탄등도 서방처럼 화력을 퍼부을 만큼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로 말미암아 화력을 포기해버리고 징병제도를 강화해 인적 자원의 대량 동원 시스템으로 갖추게 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런 인력중심의 시스템이 제편되면서 강력한 화력과 고착진지 혹은 적에대한 공격을 위해 병사들의 공격을 위한 끊임 없는 의지 즉 정신주의가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예를들어 일본 육군의 전략 전술의 기본원칙을 담은 [통수강령]에서는 '물질적 진보는 심대하지만, 승패의 주된 원인은 여전히 정신적 요소에 있으며',이 정신적요소로 '부족한 군대와 자재'를 넘어설 것을 담고 있었습니다. 또 [작전요무령]에서도 '훈련이 주도면밀하고 필승 신념이 확고하며 군기가 엄정하고 공격정신이 충만한 군대는 물질적 위력을 능가'할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한마디로 답이 없습니다.

 

일본군이 러일전쟁에서 많은 보병을 잃은 것은 화력주의의 문제가 아닌 순전히 자신들의 오판이었던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일본군은 화력은 줄이면서 기동성에 크게 중심을 두고 개편했으며 특히나 강력한 백병전 능력을 바탕으로 우회 기동 포위와 밀어붙이기 그리고 야간 기습과 적진으로의 강습에 상당히 능했으며 기동전에서도 자전거를 사용하여 길이 아닌 곳을 헤집고 들어가 순식간에 적에게 빠르게 우회해 압박을 주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이런 인력 중심의 백병주의는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등 일본이 자행한 대동아 공영권을 위한 전투에서 상당히 효과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군을 포함한 타군들의 훈련수준은 일본군에 미치지 못했으며 화력과 지원도 일본군에 비해 열악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본군의 이런 강습에 대한 특징은 초기 서방군 특히나 영국군에게 아주 효과적으로 먹혔는데 전형적인 서방의 군대가 길을 따라 움직였으므로 우회하여 정글 속에서 움직이는 일본군에게 쉽게 포위당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사실 [퍼시픽] 1화 마지막에 나온 전투에서의 반자이 돌격은 사실 타하라 강 하구의 모래둑을 따라 우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정면의 화력이 받쳐주지 못했던 것이 불운이었죠) 또한 미군이라 하더라도 신병들에게는 특히나 효과적으로 쉽게 구멍을 낼 수 있었습니다.(갑자기 불쑥 튀어나와 번쩍거리는 칼을 들고 뛰어온다 생각해 보십쇼) 물론 서방 군대에 대한 일본군의 우위는 정글 전에 대한 서방 군대의 이해 증가와 강력한 화력망 그리고 서방 군대 자체의 높은 차량 비율로 밀어 붙이는 보급 및 정찰의 이점과 백병전에대한 연구가 십분 발휘되면서 또한 내부 주민들의 반발과 게릴라 활동으로 인해 이 융통성 제로의 말종 옥쇄의 군대는 명을 다하게 됩니다. 

 

 

 무엇이 그들을 미치게 했는가?-반자이 돌격을 만든 요인들

 

 가와노 히도시는 2차 세계대전 시의 미군과 일본군의 행동패턴을 비교분석해 미군을 '생환의 군대'로 일본군을 '옥쇄의 군대'로 묘사하였으며 미국의 대표적인 일본 연구자 존 다워는 2차 세계대전 중의 미국인에게 일본군은 '이상한 규율과 전투 기술을 가진 일본인 초인'으로 각인되어 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초인이 되도록 하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적으로는 문화적 요인을 꼽을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에도시대의 무사도가 크게 강조되었던 시기라는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당시 일본은 외국 세력에 대한 배척과 독자적인 제국 건설을 위해 강력하게 자국 문화에대해서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민족주의적인 성향에대한 파시즘적 강조는 특히나 무사도에서 말하는 무항복주의와 치욕의 문화가 군국주의와 결합하면서 잔인성과 절대적 충성심, 맹목성이라는 성격을 심었고 결과적으로 옥쇄와 산화, 집단 자살, 가미카제와 같은 극단적인 행동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무라이라는 계급은 에도시대에도 꼴랑 7%에 불과하였으나 일본인들에겐 오랜 세월동안 사무라이라는 계급은 동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군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국민들에게 닮아야 하는 모습을 제시하였던 것 입니다. 특히나 군인과 사무라이와의 대입을 즐겨 이용했는데 전시 포스터에서 부터 군국주의에 대해 강조하는 만화까지 만들어 내며 꾸준히 강조해왔던 것입니다.(이때문에 일본 애니메이션 사업이 번창했다는 우스게 

소리도 있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이들의 이런 심성은 대전 중 서양에 대해 강한 인상을 심었으며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면서 일본 경제 재건에 발맞춰 전후 일본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두번째 요인으로는 일본내의 사회적으로 퍼져있는 '위에서 부터의 강제' 즉 정신교육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 정신 교육을 철저하게 강조했는데 특히 개인을 가족, 고향 공동체, 천황에대한 것들을 끓임 없이 강조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군인칙유의 경우 군인의 덕목은 천왕에대한 충성이며 일본군은 국민의 군대가 아닌 천왕의 군대여야 하며 상관의 명령은 천왕의 명령임으로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일대가족'이라고 하여 내무반을 가족의 공간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대량으로 동원된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위한 시설로서 집단 거주형 내무반이 고안되어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정신주의적 규율과 폭력장치가 동원되었습니다.(당시 일본군 내부에서의 구타는 말그대로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뺌따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똥통에 머리를 집어넣거나 원산폭격의 경우 각목으로 맞는 경우는 비일비재였습니다. 또한 이는 개인이 맞는게 아니라 내무반 전체가 공동 책임이었습니다. 때문에 일본군의 자살률은 상당히 높았는데 특히 1전5리(신병의 병명 당시 우표 값이라는 군요 말그대로 껌값)의 자살률이 가장 높았습니다.) 또한 정신 교육에 아예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받지 말아야 하며 죽음으로 오명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구절을 넣어 사실상 옥쇄 를 종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기계적인 교육은 일본군으로 봤을때는 상당히 효과적이었습니다. 어찌나 잘되었던지 적민간인과 적군에 대해 구별 조차 못하고 무차별 적으로 죽였죠. 결과적으로 감히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로봇군단을 탄생시키게 됩니다만 결국 그들은 로봇일뿐 문제점에대한 개선이나 독자적인 판단은 사실상 배재되거나 알아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때문에 죽어갔죠

 

 

 마지막 요인으로는 히로뽕을 들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잘 훈련되고 정신무장이 확고한 군인일지라도 결과적으로 사람임으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생존의 본성을 당연히 느끼게 됩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군기(사실 군기란 총알을 쏘는 곳에서도 진형을 지키며 서서 가만히 있는 것이 군기입니다 이유는 다음에 설명해드릴게요)가 없는 것이고 결과적으론 일본군의 입장에선 강습이나 돌격을 하는데 머뭇거리게 되므로 병사들에게 본능을 없애는 것으로 이 항정신성 물질을 투약 시켰습니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매우 효과적이어서 말그대로 병사들을 광란에 빠져 싸우게 만들었습니다. 말그대로 정신줄을 놓고 싸우게 하는 것으로 어찌본다면 이것이 슈퍼맨 군인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여담이지만 전쟁후 맥아더 통치기에 전쟁때 사용되던 히로뽕들이 대량으로 민간에 흘러나와 대량의 마약 중독자들을 양산하여 크게 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마무리

 

 백병전은 대전기의 일본군을 제외하더라도 상당히 많이 사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중공군이나 월맹군, 소련군, 영국군 그리고 한국군 등등 의외로 많은 군대들이 소위 현대전이라고 불리는 2차대전 이후의 전쟁에서 선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왜 유독 일본군만이 비웃음 거리가 될까요. 그 이유는 일본이 가지고 있는 인명경시 사상과 절대적으로 인력에만 의존하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백병주의, 광신적인 천왕에대한 충성 그리고 옥쇄등 살기위한 또한 적에게 충격을 주기 위한 백병전이 아닌 단순히 죽기위한 정신주의에 목메어서 공상만을 위한 전투를 전개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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