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사

1940년대 초 미군 징집 상황에 대한 소고

by 바스통 2020. 7. 20.
728x90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미군은 겨우 17만 4천명의 병력만을 보유하고 있던 군대였다. 때문에 어떤식으로든 징병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FDR은 국민들에게 징병의 필요성을 계속 역설했으며 1940년 여름 동안 의회는 징병 법안을 손질하였다. 결국 1940년 9월 의회는 선별적 훈련 및 복무법을 통과시켰고 이 법에 의해서 21~35세 남성 약 1650만명이 징병을 위해 등록을 해야 했다.1 결국 1940년 10월 16일 미국 전역에는 병역 등록소가 설치되었으며 등록은 예상과는 다르게 조용하게 끝났다.2 이로써 미군은 징병제 군대로의 첫걸음을 나가게 되었다.

 

 수십만명에 달하는 병력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미 육군은 미 전역에 46개의 훈련소를 새로 증설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연방 예산이 1940년 한해 동안 제대로 배정되지 못하면서 육군은 병사들을 훈려시키면서 훈련에 필요한 물자와 시설을 동시에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병사들은 당장 아무 것도 없는 허허 벌판에 던져지게 되었다. 병사들은 땅을 개간하고 도로를 내고 막사를 짓고 사격장과 하수도를 놓고 장교 숙소를 짓는 작업의 연속에 처하게 되었다. 징병 이후에 부대 증설이라는 시간표는 병사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쳤다. 새로운 군부대 지역에 배치된 병사들은 전혀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처음으로 경악하였고 많은 부대 시설들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심지어는 숙소 조차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분대용 겨울 텐트에서 6명 혹은 그 이상의 병사들이 한 텐트에 낑겨 겨울을 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1차대전 당시에 만들어진 시설들도 상황은 전혀 좋지 못했다. 전간기에 이런 시설들에 대한 관리는 제대로 되어있지 못했다. 예를 들면 1917년에 세워진 앨라바마에 매클레런 요새는 더럽고 진흙투성이었으며 많은 임시시설들은 미완성에다 임시 방편이었다. 이런 1차대전 당시의 부대에 배치된 병사들도 텐트에서 생활하였으며 텐트마다 설치된 난로는 종종 소규모 화재 소동을 내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부대 도로 주변 정비는 제대로 되지 못해 병사들은 도로 문제로 훈련을 멈추거나 작업에 동원되어야 했다. 이런 작업의 연속은 징집병들로 하여금 군생활에 환멸을 느끼게 하기 충분하였다. 

 

 군부대에는 건물과 막사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물자도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에 있었다. 훈련소에 도착한 병사들은 철모와 군장 그리고 총기를 포함한 기본적인 지급품을 지급받아야 했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 상황을 빚대 어떤 언론은 병사들이 '85달러 어치의 옷만 있을 뿐 파자마는 없다'고 빈정거렸다. 하지만 최초에 징집된 병사들은 카키 근무복과 훈련복 조차 부족해 1차대전 당시에 입었던 m1917 울셔츠와 울바지를 지급받아야 했다.

 

 많은 부대들이 무기 탄약 훈련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자 병사들은 대걸레 자루를 대공포라 생각하고 훈련하였으며 트럭에는 탱클는 간판을 달고 다녔고 통나무를 대포 거치대로 사용하는 촌극이 군부대마다 벌어졌다. 심지어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회고록인 <유럽의 십자군>에서 "병사들은 나무로 만든 곡사포와 기관탄총 모형을 들고 훈련했고 우리의 신형 무기 중 몇개는 청사진만 가지고 연구했다." 이런 신형 무기들은 "보병들의 사기 진작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열악한 부대들의 상황과 더불어 엄격한 군기에 적응하는 것도 징집병들은 굉장히 고통스러워했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기동 훈련과 제식 훈련은 몇시간 동안 계속 되었으며, 병사들은 끊임 없이 시험을 받았고 등급을 부여 받았다. 높은 등급(특등사격휘장 등)은 곧 진급, 봉급 인상, 부대 내 높은 사회적 지위를 의미했으며 낮은 등급은 불명예로 여겨졌다 때문에 병사들은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으며 이런식의 군사훈련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다.

 

 문제는 열악한 부대 상황은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과 긴장 완화를 전혀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휴가나 외박을 얻지 않는 이상 병사들은 분대 텐트만 갈 수 있었으며 다른 편의 시설은 전혀 제공되지 못했다. 특히나 민간인 시절의 취미를 전혀 영위하지 못하면서 많은 병사들이 비참해졌고 외로움과 고립 우울 등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해야 했다. 

 

 그나마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음악이나 운동은 약간의 오락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단체 활동은 새로 정비되는 부대 일 수록 인기가 없었다. 연구에 따르면3 대부분의 병사들은 자유 시간에 비교적 독립적인 활동들 예를 들면 편지 쓰기, 잡지나 책 읽기, 영화보기 등 개인적인 활동을 하기를 원했다. 오직 16%만 운동을 하는 것을 더 선호했고 노래나 음악 감상은 단지 5%만 선택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훈련 캠프, 낮선 사람들, 전쟁터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일시적이나마 도피하고 싶어했다.

 

 이런 일련의 연구 결과는 당시의 육군성으로 하여금 병사들의 사기와 병영 수준이 개선되지 않으면 효과적인 훈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주었다. 기존 훈련소와 시설이 잘 갖춰진 신설된 훈련소를 비교해본 결과, 훈련을 받는 태도와 열성 그리고 군생활 적응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부분적으로는 오락의 유무에 달라졌다. 예를 들어 조지아의 포토 베닝은 대규모 영화관, 도서관, 당구장, 게임과 노래방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어 일과 이후 병사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는 동일한 훈련 강도를 가진 훈련소와 비교했을때 포토 베닝에 있던 병사들이 군생활과 훈련에 더욱 열성적으로 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미 육군은 즐거움과 오락이 바람직한 군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사항이라고 결론 내렸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