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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미주 한인의 2차세계대전 참전

by 바스통 202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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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재미 한인 사회는 2세 청년들이 성장함에 따라 새로운 인재를 확보하는 한편, 2세들의 정체성 문제를 겪게 되었다. 첫 이민 이후 30년이 지나는 동안 미국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한인 젊은이들이 이민 사회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이민 1세와는 다른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 이민 세대가 노령화되어 가면서 미국에서 교육받거나 태어난 이른바 1.5세 및 2세들은 한인 사회에 변화를 요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29년 말부터 1933년 초까지 하와이 한인 사회 내부에 상당한 풍파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1931년 초에 발생한 이른바 ‘교민 총단관 점령 사건’이었다.註 070

 

 1930년 이후 한인 2세들이 지닌 자기 정체성은 ‘한국계 미국인(Korean American)’이라는 것이다. 일제가 진주만을 공습하였을 때 한인 1세들은 이 전쟁을 조국 광복의 기회로 여겼던 반면에 2세들은 ‘미일 전쟁’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되면서 “미일 전쟁은 곧 우리 전쟁으로 인정”하고 한인 청년들은 미군에 입대하였다.註 071 다시 말해 미국에서 나서 자란 한인 1.5세와 2세 청년들은 군에 입대하여 직접 전쟁터에서 싸워야만 하였다. 

 

 한인 단체들은 미군에 입대하라는 캠페인을 벌였고 한인 1.5세 및 2세들은 이에 적극 호응하였다. 당시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은 미국 본토에서만 200명 가까이 미군에 복무하고 있었고, 하와이에서는 훨씬 많은 숫자가 종군하였다. 이민 1세들은 언어와 관습 등 모든 면에서 미주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하였지만, 미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한인 2세들은 심리적 불안감이 없기 때문에 이민 1세들에 비하여 안정적으로 정착하여 미국 시민이 되어 갔다. 하와이의 제일한인감리교회에서만 58명이 종군하였는데,註 072 그 중에 최제성과 칼 강은 고사포 병사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무수한 비행기를 격추하였다.註 073 그리고 현도명의 아들인 존 케이 현(John K. Hyun),註 074 전경무의 종제 잭 전(Jack Dunn), 정두옥의 아들 정남선 등도 참전하였다.註 075 미 본토에서도 1942년 상항한인교회의 청년 중 6명이 군대에 입대하였고, 1944년 10월까지 17명이 참전하였다.註 076 그리고 안창호의 자녀들인 안수산과 안필립, 안랄프 등도 미군에 입대하였다.註 077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재미 한인 2세는 하와이에서 600여 명, 미주 본토에서 200명이었으며, 그 중 장교가 200여 명이었다. 

 

 신한민보사는 전쟁에 나간 재미 한인 2세들의 「용사록」을 만들었다. 참전한 한인들 가운데는 여러 전역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도 많았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인 재미 한인은 김영옥이었다. 그는 대학생이던 22살 때 미 육군 사병으로 입대하였으나, 그 후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인 2세들로 구성된 니세이(Nisei) 부대 제100 보병대(The 100th Infantry Battalion, 후에 the 442nd Regimental Combat Team)의 지휘관이 되어 이탈리아와 북프랑스에서 치열한 전투 7차례를 치러 전승을 거두었다.註 078 그는 탁월한 전공으로 인해 1944년 9월 소령으로 진급하였으며,註 079 나아가 미 육군과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가 주는 군 최고의 훈장을 받았다. 

 

 이처럼 한인 2세들이 종군하면서 미주 사회에서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각인시켜 주었다. 이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사무과에서는 미군에 종군한 한인 2세들을 위해 「종군기」를 만들어 국민 총회관 벽에 걸어 놓고 용사 스타를 붙여 종군을 표시하였다. 또한 한인 교회에서도 교회 안의 전면에 미국기와 태극기 외에 서비스기(Flag of Service)를 걸었다. 서비스기에는 출전자의 수를 따라 별을 붙였으며, 전사자는 금색 별로 표시하였다.註 080 

 

 당시 하와이에 거주하던 권정숙(Margaret K. Pai)에 따르면, 1944년 그녀의 남편 필립배(Philip Pai)도 전투에 불려 나갔고, 1945년 2월 그녀의 동생 권영철(당시 18세)도 입대하였다고 한다.註 081 또한 피터 현(Peter Hyun)도 1944년 38세로 입대하여 오클라호마에서 6주간 군사 훈련을 마치고 군사어학학교에서 일본어 과정을 3개월 만에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 전쟁 포로를 수용하고 있던 위스콘신 주 맥코이 수용소(Camp McCoy)의 통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註 082 또한 미 본토에서도 김영철은 44세에 입대하여 육군 정보부에 종사하고 솔로몬 섬에서 부상을 당하였다.註 083 

 

 이처럼 많은 재미 한인들은 전쟁에 나가 미국의 대일전 승리에 도움을 주었지만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남태평양에서 전사한 김성용,註 084 이탈리아에서 전사한 김제춘,註 085 영국에서 전사한 이원규,註 086 레이테(Leyte) 전선에서 전사한 전정교,註 087 필리핀에서 전사한 장이삭,註 088 한로벗명교,註 089 양윌림註 090 등 꽃다운 한인 청년들이 전쟁에 희생되었다. 나성한인장로교회의 교인으로 전사한 한인만 7명이나 되었다.註 091 

 

 비록 참전은 하지 않았지만 재미 한인들 가운데 실업인, 전문직의 40∼55세의 연령층은 미국의 방위 계획이 시작되고 선전 포고가 되었을 때 국방과 전쟁 활동에 전적으로 참여하고자 하였다. 25∼40세 연령층 가운데 한문과 일본어 지식이 있는 교포들은 번역사, 통역사, 교관 등으로 미국의 전쟁 수행을 도왔다.註 092 또한 재미 한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지식층의 상당수가 미군의 특수 부대에 들어가던가, 아니면 정부 각 기관에서 번역·검열의 일에 종사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전쟁을 지원하였다.註 093 

 

 전쟁 기간 중 한인들이 펼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캘리포니아 주 경위군에 한인 중대가 별도로 편성되어 활약하였다는 점이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캘리포니아 경위군과 협의하여 한인 남자 18세부터 65세 가운데 지원자에 한하여 한인경위대(Korean Brigade)를 1941년 12월 22일 창설하였다.註 094 한인경위대가 편성된 후 국적 문제 때문에 미 육군에 부속되지 않고 캘리포니아 민병대에 부속시키기로 합의를 보았다.註 095 한인경위대를 일반적으로 ‘맹호군’이라고 불렀는데, 같은 해 12월 29일부터 로스앤젤레스에서 훈련을 시작하였다. 맹호군의 창설 목적은 재미 한인도 미군과 같이 항일 전쟁에 참가하여 연합국의 승전에 이바지하는 동시에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고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맹호군의 병적에는 처음에 18세에서 65세에 이르는 한인 남자 50명이 등록하였고, 나중에는 로스앤젤레스 지구에서만 109명으로 늘어났다. 대부분이 군대 징집 연령을 넘었지만,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로스앤젤레스의 박람 공원(Exposition Park)에서 훈련을 실시하였다.註 096 또한 샌프란시스코에서도 1942년 6월에 주 방위군 제1연대 K중대로 창설되었으며,註 097 30여 명의 한인이 매주 토요일 오후 훈련을 받았다.註 098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었던 하와이에서도 호놀룰루와 각 농장에서 경위대를 조직하여 조련하며 사격 연습을 하였다. 하와이 경위대에는 한인과 함께 미국인, 중국인, 필리핀인 등이 합동으로 훈련을 실시하였다.註 099 

 

 

註 070 : 김도형, 1998, 「1930년대 초반 하와이 한인사회의 동향」, 『한국근현대사연구』 9 참조 

註 071 : 정두옥, 앞의 논문, 89쪽 

註 072 : Appenzeller, Alice, 1946, “A Generation of Koreans in Hawaii,” Old Korea-The Land of Morning Calm, Hutchinson, p. 61 

註 073 : 정두옥, 앞의 논문, 94쪽 

註 074 : Hyun, K. John, 1986, 『국민회 약사(國民會略史)』, 고대 민족문제연구소, 28쪽 

註 075 : 정두옥, 앞의 논문, 89쪽 

註 076 : 유동식 감수, 성백걸 지음, 2003,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과 교회』,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100년사편찬위원회, 464∼465쪽 

註 077 : 존 차 지음, 문형렬 옮김, 2003, 『버드나무 그늘 아래-도산 안창호의 딸 안수산 이야기』, 문학세계사 

註 078 : 민병용, 1986, 「2차 대전의 영웅 한인 2세, 김영옥 대령」, 『미주 이민 100년: 초기 인맥을 캔다』, 한국일보사, 102∼103쪽 

註 079 : 『신한민보』 1944년 9월 28일자, 「김영옥 대위 소좌에 승격」

註 080 :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70년사』, 78쪽

註 081 : Pai, K. Margaret, ibid., p. 143 

註 082 : Hyun, Peter, ibid., pp. 189∼190. 맥코이 수용소는 위스콘신 주 스파르타(Sparta)와 토마(Tomah) 근처에 있었으며, 38개 포로수용소 가운데 가장 큰 곳이며 주로 독일군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註 083 : 선우학원, 앞의 책, 78쪽 註 084 : Hyun, K. John, 앞의 책, 28쪽

註 085 : 『신한민보』 1944년 6월 1일자, 「김제춘 소위 전사」 

註 086 : 『신한민보』 1944년 9월 14일자, 「이원규 중위 영국서 전사」 

註 087 : 『국민보』 1945년 1월 10일자, 「한계 병사들의 소식」 

註 088 : 『국민보』 1945년 2월 28일자, 「장군의 전사」 

註 089 : 『국민보』 1945년 3월 14일자, 「추도회」

註 090 : 『국민보』 1945년 5월 24일자, 「일반 회원께」 

註 091 :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70년사』, 78쪽 

註 092 :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 『한국과 태평양 전쟁(Korean and Pacific War)』, 976∼977쪽 註 093 : 방선주, 1992, 「1930∼40년대 구미에서의 독립 운동과 역강의 반응」, 『매헌윤봉길의사의거60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 한국독립운동과 윤봉길의사』, 353쪽

註 094 : 『신한민보』 1941년 12월 25일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국방과 포고 제2호」 

註 095 : 이원순, 앞의 책, 249쪽 

註 096 : 최봉윤, 1986, 『떠도는 영혼의 노래-민족 통일의 꿈을 안고-』, 동광출판사, 177∼178쪽 

註 097 : 국가보훈처, 2005, 「February 20, 1943. (To) Colonel Truman M. Martin (From) C. S. Kim」,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재미 한인 자료』, 152쪽 

註 098 : 『신한민보』 1942년 8월 13일자, 「상옥 경위대 완전 조직」; 최봉윤, 앞의 책, 79쪽 

註 099 : 『태평양주보』 1942년 7월 15일자, 「전시 생활과 공채」; 『국민보』 1942년 7월 22일자, 「하와이 경위군 모집」

 

 

 

출처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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