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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과 철수

by 바스통 2016.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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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셰비키 혁명이 터지고 과도 정부가 무너지면서 러시아는 말그대로 혼란의 연속인 상황에 직면하였다. 구 체제 옹호파와 공산 혁명 정부와의 갈등은 결국 적백 내전으로 비화 하였으며, 서구 국가들인 이 새로운 이념의해 세워진 정부와 그에 반발하는 세력 간의 내전에 대해서 좋지 않은 심정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더군다나 동부전선에 있던 독일군이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면서 연합국은 휴전을 한 공산 정권에 대해 손을 볼 필요성이 있었다. 이것이 국제 간섭군이라는 연합국 군대가 시베리아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국제 간섭군의 목표와 일본의 목표


국제 간섭군은 미군 8천명, 캐나다군 4천명, 이탈리아군 2천 400명, 그리고 일본군이 9개 사단 7만 5천명으로 구성되었다. 당초에 일본에게는 7천명의 군대만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기어코 대규모로 사단을 파병하였다. 국제 간섭군의 목표는


 1. 블라디보스톡으로 동진하고 있는 체코군단 구원

 2. 백군 정부에 대한 지원 및 공산 혁명확산 저지


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 간섭군의 영역은 블라디보스톡과 그 일대에 따라 배치되었으며, 실질적으로는 간접적인 군사 개입의 역활만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속내는 달랐고 적극적인 참여파가 대두되면서 병력의 규모를 왕창 늘려버렸다. 이에 대한 일본의 속내를 보자면


 1. 시베리아에 소련과의 완충 지대 수립

 2. 러일전쟁에서 획득못한 이권, 특히나 북 사할린과 만주에 대한 인정

 3. 일본으로의 공산주의 확산 저지


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일본정부에게 시베리아로의 개입은 국제 사회가 만주 지역과 역내 개입에 대해서 멍석을 깔아준 것이라고 받아드렸다. 때문에 일본군은 시베리아에 진주하자 마자 당초 약속에 있던 블라디보스톡을 지나 사할린과 만주 철도, 바이칼 호수의 서부까지 점령하면서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게 된다. 

 이를 타군이 저지하지 않은 이유는 원래 목적이 공산 정권 저지였던 만큼 굳이 일본이 월권행위를 해서 깊숙한 곳까지 나아간다고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이 없었으며, 당시의 다국적 연합작전의 특성상 각군의 의견을 조율한 기구도 없었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수천의 군대로 뚜렷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타 연합국들은 일본의 영토 야욕에 대해서 굉장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는데 이후에 특히나 미국과 일본 간의 미묘한 기류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일본의 최종적 철군까지 


1차대전이 끝나면서 서구 연합국들은 시베리아에서 계속 주둔할만한 명분이 크게 약화 되었다. 전쟁 이후에 군비 축소 여론은 물론이고, 백군이 다시 정권을 잡아 독일에 대항해 동부전선을 다시 개전 시켰으면 하는 바램을 더 이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애초에 개입의 목표가 모호하고 실제로 달성 여부도 불투명해지면서 국제 간섭군의 사기는 크게 낮았다. 여기에 백군 정권인 콜자크 정권이 수세에 몰리며 붕괴 직전이 되고, 체코 군단이 블라디보스톡으로 귀환하자 더 이상 점령의 이유가 없었던 캐나다군과 미군, 이탈리아군은 1920년 6월경에 완전히 손을 때버린다.


 반대로 외세와 손을 잡은 백군과 그 정부는 완전히 민심을 이반하게 되었으며, 1920년경이 되면 유명무실화 된다. 여기에 더해 일본이 철도를 놓으면서 시베리아 내륙으로 진출하게 되는데, 비록 7만 이상의 병력이었지만 시베리아 한쪽을 완전히 점령할 수 없었다. 여기에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한 게릴라 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1919년 1월부터 일본군의 피해는 불어나게 된다. 여기에 일본은 단독 혹은 백군과의 연합을 통해 대게릴라전을 대응한다. 하지만 고전하게 되자 그 해 2월부터 아예 초토화 작전으로 방향을 틀어 의심 가는 마을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강간과 학살을 병행하게 되면서 민심을 더욱 이반시키게 된다. 1920년대에 일부 선무 공작을 벌리기도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더군다나 러시아 유격대가 일본군 주둔지와 거류지를 공격하는 등 양측이 말그대로 피의 향연을 찍게 된다.

 

 여기에 일본군도 당초 모호한 명분으로 인해서 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낮았으며 장교와 하사관의 질도 굉장히 낮은 상태였다. 당연히 군기는 엉망이었고 병사들은 완전히 전쟁이 뻘밭으로 치달은 1920년 부터는 아예 유흥에 완전히 목을 메게 된다. 여기에서 성병의 유행이 엄청난 문제로 대두되었다.(하지만 철수요인은 아니다) 더군다나 보급도 굉장히 문제가 되었는데 혹한에 대비한 방한구류 보급이 지연되었고 동상 환자가 급증하였다. 여기에 작전 부대에 현지 증발과 보급이라는 명령이 내려지면서 강도행위와 학살을 더욱 부채질하였으며 탈영이 급증하였다. 일본군은 시베리아 철군 전까지 4억 4천만엔의 전비를 쏟아붙고 전사자 3000~5000명에 비전투 사상자만 수천에 달할 정도로 병력을 갈아넣었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잘해줘도 고작 철도망 이식과 정보망 형성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코차크 정권이 붕괴되면서 더 이상 버틸 수도 없었다. 


 끝까지 남아있던 일본은 1921년 워싱턴 회의를 기점으로 국제사회에 서서히 철군 의사를 피력하게 된다. 굳이 실익도 없고 피해만 늘어나는 시베리아에 붙어있다가 서구와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여기에 쌀소동으로 이어지는 투기 세력의 대규모 쌀 매점 매석으로 국내 정권도 불안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22년 6월 완전 철수를 발표하고 그해 10월에 완전 철수하게 된다.


 시베리아출병이 이런 엄청난 피해에도 사회에 크게 다뤄지지 않는 것은 번별 체제가 완전히 무너지고 정당 정치로의 교체기였던 것도 있지만, 사실 일본군당국과 치안당국이 국내외 여론 악화와 국민 감정을 의식해 출병 반대 의견에 굉장히 강압적으로 탄압하였고 귀환병들에게 함구령을 내리고 보도 통제에 만전을 기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투발과 투서로 뭔가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은 여지 없이 불온주의자로 몰려 끌려가게 되고 여론은 희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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