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 즉 베트콩이 베트남전쟁에서 지대한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이 어떻게 베트남 공산당과 공산정부에에 흡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들을 만한 통로 자체도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국가가 수립되면서 정보창구가 없어진 것도 이유일 것이고 과거 반공 교육을 받았던 세대는 베트남에서 나온 보트피플들을 보면서 뻔한 정훈 내용만을 보았을 것이고 요즘 세대들은 그게 뭔지 알지도 못할 것이다. 단지 위키에 1976년에 '베트남 공산당으로 발전적으로 흡수되었다'고 하는 이 문장은 사실 (그들의 말로는) 배신당한 자들의 암투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해보인다. 이것은 그들의 1년동안의 이야기이다.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란?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들에 대해서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들이 결성된 것은 1960년 12월 20일의 일로 캄보디아 밀림지역 부근 후일 소위 타이거랜드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FL)이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었다. 당시 이들은 10가지 강령을 선정하였는데 남베트남 정부 전복과 민주적인 정부 실현, 진보적인 민주주의 실현, 자주적인 경제 개혁, 소작료 경감과 토지 개혁, 인민군대 창설등이 주요 골자로 들어가 있는 강령이었다. 초기 의장은 구엔후토로 선출되었으며 이들은 산하에 베트콩이라는 군사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에 북베트남과 중국,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1962년에 인민혁명당(PRP)를 창당하고 1969년에 베트남 남부 임시공화정부(PRG)를 수립한다. 이들은 사실상 남 베트남의 임시적인 공산당 정부로써 활동하였으며 이런 형태로 1975년 사이공 정부가 무너지면서 세상이 바뀌게 된다.
통일 그리고 해체
본래 1975년 사이공 최후의 날 이후에 월남에대한 정부의 행정권은 베트남 임시공화국정부가 가지고 있는 것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위해서 싸웠으며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공동의 적 사이공을 무너뜨린 것은 엄연히 하노이와 북베트남군이었고 그들은 절대 사이공의 해방전선에 권력을 넘겨줄 의향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단지 그들인 남베트남 공화국을 인정했던 것은 효과적으로 정권을 이양받고 통치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우선 이들은 남베트남 임시공화국 정부의 무장병력 즉 베트콩들부터 재빨리 처리해버린다. 전승 기념 대회가 개최되기 전에 베트콩의 주요 전력이었던 베트콩 1사단, 5사단, 7사단 그리고 9사단등 모든 베트콩 전력을 무장해체시키는 것과 동시에 북베트남군으로 통폐합 시켜버린 것이다. 이것은 아무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되어서 남베트남 인사들은 전승행사때에야 겨우 북베트남군 참모총장이었던 반 티엔 쥰의 입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사실상 모든 통일에 대한 정치적 권력을 북베트남에게 넘긴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무장력까지 해체 당하자 사실상 하노이의 정치적 먹이감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노이는 소리 소문없이 남베트남 공화국 정부에 하노이의 인력들을 배치하는데 사실상 전쟁기간동안에 전문적인 인력을 양산하지 못한 남베트남 해방전선으로써는 하노이에서 내려오는 전문인력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베트남 정부의 각부서들은 하노이에서온 차관급 인사들에 의해서 장악당하게 된다. 게다가 더 웃긴 것은 남베트남 정부 재산까지도 일부 뺏는 행패까지 벌리게 된다. 심지어는 차관이 장관의 직무용 차 1대까지 뺏을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정부 실세가 어떤지 알만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북베트남이 본격적으로 남베트남에 대한 자신들의 계획을 들어낸 것은 8월에 탈랏트에서 제24차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였다. 사실 해방전선이나 남베트남 공화국 인사들은 빠르고 조속한 통일을 바라지 않은 듯하다. 즉 연방제와 같은 형태로 북베트남과 신중하게 통일 문제를 논의하면서 완만한 통일을 추구했던 것이다. 때문에 7월에는 사이공에 여러 남베트남 공산 인사들이 모여 하노이와 유엔에 남베트남 공화국 정부를 정식적인 정부로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 것을 보면 남북간의 경제적 정치적 이질성을 많이 고려하고 남베트남 정부가 어느 기간까지는 존속하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하노이는 조속하게 남베트남 정부를 흡수하고 단일화된 사회주의 베트남 공산 공화국 수립을 결의한다. 사실상 남베트남 인사들의 입장을 절대적으로 무시하는 처사였고 이것은 11월 15일 사이공에서 열린 남북 대표회의에서 일방적으로(그리고 각본에 맞게) 이것을 발표해버린다. 탄의 회고록을 보면 남베트남 공화국 인사와 정부에대한 어떠한 지위 보장도 없었다고 한다. 사실상 사망선고였다. 사실상 남베트남 인사들은 알지도 못했고 생각보다 빠른 선고였고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남베트남 정부의 물리적인 마지막은 76년 4월 25일 남북 국회의원 총선거로써 완전히 끝났다. 이 선거에서 선출된 의원들은 국명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수도를 호치민으로 옮기므로써 남베트남정부를 사실상 없애버리는 마지막 수순에 들어간다. 또한 하노이와 북베트남에 있던 조국 전선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하여 당시 남베트남 정부의 지지기반이었던 해방전선 인사들을 전부 흡수해버린다. 사실상 정부기능도 지지기반도 완전히 상실된 것이다.
하노이의 남베트남 정부 죽이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결정적인 한방을 먹였고 정치적 생명까지도 빼앗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지우려고 한다. 모든 집회와 공식문서, 신문에 이르기 까지 모든 매체에서 베트남전쟁 기간동안에 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세력에 대한 공헌과 기록은 지워버리고 오직 하노이와 공산당의 힘으로써 승리가 쟁취되었다는 것이다. 육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완전한 말살이었다. 이로써 1년동안에 남베트남 공화국 정부와 해방전선은 일장춘몽으로 그 운명을 다하게 된다.
왜 이렇게 되었나?
어째서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빠르게 흡수하였을까. 북베트남과 하노이의 입장에서 대변해보자면 우선적으로 해방전선과 남베트남 공화국 정부 인사들의 출신부터가 매우 거슬리는 것들이었다. 사실상 남쪽 출신 인사들은 공산화 전에 사회적 지위는 부르주아들나 프랑스등으로 유학을 갔던 엘리트들이 상당수 였다. 공산당으로써는 이들 또한 철저한 불신과 배척의 대상이었고 베트남 통일 정부 수립이후에 이들은 정부 요직에대한 진출이 배제 당하게 된다. 게다가 남쪽 정부에 시간을 주게되면 자기들끼리 뭉쳐 하노이에 대항하여 권력 분할을 요구하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하노이로써 남베트남 공화국 정부와 해방전선 인사들은 조속히 거세해야할 목표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남쪽에서 시행될 사회주의 경제로의 개혁이 단행되면 남쪽 주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것이 뻔 했기때문에 잡혀있던 과거 사이공 정부 요인들이나 해방전선 인사들을 중심으로 뭉쳐 하노이에 대항하게 된다면 여간 골치 아파지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미 북베트남 인사들에 의한 차별이나 그들의 부패(오죽했으면 과거 사이공 정부 부패 관리들은 신사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이미 나라돈은 내돈 니돈도 내돈이나 부풀려서 삥땅 쳐먹는 다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진 문제다)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까지 고려한다면 기폭제 제거는 확실히 한 셈이었다.
사실 1973년 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이 미국과 파리에서 평화회담을 나왔을 때 주창했던 남베트남 민중의 자결권에 대한 이 양자 간의 공동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궁극적인 목표의 차이로 완전히 박살나버렸다고 해야겠다. 어찌 본다면 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인사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한 일일 것이다. 몇몇은 호치민이 있었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마치 레닌이 살아있었다면 스탈린은 없었을 것이라는 예기나 힌덴부르크가 노망만 안 났어도 히틀러는 찌끄러기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것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단지 그것은 시기의 차이였을 뿐 결국 히틀러든 스탈린이든 북베트남이든 자기 입맛에 맞게 알맞게 쓰고 버릴 준비가 되어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을 미리 간파하지 못한 순둥이들인 자신을 탓하지 않고는 달리 방법이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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