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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근대 국가의 무력과 경제 변화

by 바스통 2020.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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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국가의 형성에서 수세기 동안에 걸쳐 진행된 무력 투쟁 즉 전쟁이라는 것은 초기 근대국가라고 할 수 있는 절대주의 국가들이 성립되는데 중요한 요소였다. 일정 범위 안에서의 물리적 강제력=군사력에 대한 국가의 독점과 이를 통한 대내외적인 주권 주장은 곧 국가가 물리적 행위력을 독점함으로써 봉건 시대의 쪼개지고 분산 되어진 질서를 국가가 통제하도록 하였다. 따지고 보면 로마제국 붕괴와 프랑크 왕국의 붕괴 이후 봉건적 사회 질서 하에서 수많은 정치 세력들이 성립되었다 무너져갔으며 몇개의 정치세력이 남아 있을 때까지 이들은 수도 없는 무력투쟁과 정치 싸움을 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조건 하에서 근대국가의 역사적 성격이 나온다. 즉 근대 국가라는 체제는 고대 제국들과는 달리 개별국가들을 하위기관으로 하는 별개의 질서로 나온 것이 아닌 그 구성인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의 성격도 달라졌다.

 

 기본적으로 자연 경제 체제 하에서의 경제란 무력 수단의 소유가 곧 생산수단 소유의 기반이었고 무력이 잉여 생산 수취의 직접적 수단이 되던 시대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수세기에 걸쳐서 전 지역에서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경제와 정치는 별도의 나눠진 부분이 아닌 합일된 과정이며 정치가 직접 경제에 개입함으로써 사회 내에서의 부의 생산과 분배에 관한 질서를 새롭게 규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이에게는 '전리품'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이에게는 '수탈'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초보적인 경제적 시스템 하에서 발전한 것이 봉건제였고 결과적으로 무력을 잉여 수취의 직접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회질서적 성격을 내포하게 되었다. 

 

 15C까지의 후기 중세 유럽의 농업 생산성과 무역량은 정체된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영토를 정복함으로써 즉 새로운 생산 수단을 강점하고 넓혀감으로써 얻어내는 이익에 비교할 때 이는 상당히 작은 것이었다. 따라서 정복 전쟁과 영토 정복은 당시 지배계급이 자신의 부를 확대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면서 신속하고 간단한 방법이었다. 이는 키에난의 요약1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전쟁이 얼마나 일상적이었으며 합리적인 사업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군사적 특성상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보다 많은 군사적 자원을 동원 할 수 있었던 큰 규모의 정치조직들 즉 왕국들에게 유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15C를 기준으로 소영주들까지 포함해 근500개에 달하던 독립 된 유럽 내 정치 세력들을 더 이상 정복할 수 없을 때까지 지속하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들이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초기 근대국가 즉 절대주의 왕정이다. 이들의 지리적인 규모는 자신의 세력권 즉 인접한 정치세력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의 자원적 영역과 당시에 효과적으로 중앙 통제가 발휘 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제한되게 되었다. 만약 이 이상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은 외부적으로 견제를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그 비용까지도 증가시켰기 때문에 부담으로 작용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존과 중앙 통제에 맞는 제한된 범위는 봉건 제후들보다 유리했음은 물론이거니와 당시에 있었던 신성 로마 제국이나 스페인과 같은 느슨한 형태의 제국들보다도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이러한 중간적 위치 상태는 군사혁명을 거치면서 확고하게 되었는데 보병대로 대표되는 근대 군사체계는 일정한 제정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이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봉건제 하에서의 기사군은 이들은 동원하던 영주의 주머니에서 군비가 나갔다면 보병대는 그 모든 군비가 군주의 주머니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특히나 새로운 군사 체제는 전투의 방식도 바꿔 장기전으로 만들어버렸음으로 전투 능력이나 기술 보다는 재정적 능력에 따라서 좌우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새로운 군사 자워들의 유지와 운영은 당시 국가에게도 버거운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내의 수입으로만 모든 지출을 감당해야 했던 봉건적 관념은 이들의 군비 유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때문에 이들은 군비를 충당할 가장 간단한 방법인 대부를 받는 것을 선택하였으나 궁극적으론 군주 자신의 재정 능력을 높여야하는 것이 중점이 되었다. 때문에 군주는 자신의 세력권 전체에 걸쳐 조세를 치르는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세의 성공 여부는 결국 조세를 부과하는 지역의 경제력에 달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금화하기 쉬운 상업적 부를 만들어내느 도시 중심의 상업 경제는 중요한 요소 였으며 군주들은 이런 상업경제를 확대하는 정책을 펴게 된다. 

 

출처: 새로운 전쟁

        국가 전쟁 한국

        위키피디아 등 

 

 

  1. 이 새로운 왕국은 자신의 성장 기반이었던 봉거제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전쟁 지향적 성격을 품고 있었고, 이것은 결코 사라질 것이 아니었다. 이 왕국에 있어 전쟁은 선택적 정책이 아니라 유기적 필요였다. 외부의 적을 패퇴시키는 능력은 군왕에게 반항적인 귀족들과 반란을 기도한 농민등 모든 신민들에게 그들도 동일하게 취급 될 수 있다는 힘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조세를 강화하고 정규화하는 구실이 되었다. 지배자들이 부분적으로 만들어 온 전체의 국가 기구는 대체로 전쟁의 부산물이었다. 16C-17C, 즉 근세 초에 있어 전투는 거의 지속적이었고 뒤에 가서 점차 간헐적이 되었다. -V.G.Kiernan, state and nation in westen eu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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