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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파월한국군을 보는 미군의 시선

by 바스통 2020.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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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파월한국군하면 구식무기를 들고서도 공산군과 싸워 이기는 '용맹한 전사'라는 이미지를 가진 최강의 군대로 평가 받아 왔습니다. 더군다나 고보이의 교훈과 같이 민사작전에서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과연 인간이 하는 일에 찬사만이 있을 수는 없겠죠.

 

 더군다나 상당수의 찬사들은 언론에서 떠들은 것들도 많았습니다. 물론 그만큼 용맹했고 전과도 상당히 좋았기에 영국의 모 축구팀이 이름이 맹호가 되는 찬사를 받았지만 간과해선 안되는 것은 언론은 군인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는 것이 문제겠죠. 그래서 동맹군이었던 미군들의 평가를 준비해봤습니다. 

 

 

 우선적으로 전형적인 찬사를 보낸 인물로 MACV에 사령관을 맡았던 웨스트 랜드모어 장군을 들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회고록 '한 군인의 보고서'(A Soldier Reports)에서 일찍이 한국전에서도 187공수 여단장으로 근무(실제론 로켓리스트에 들어있어서 경력때문에 3개월하고 땡처리 했지만....그때 중공군이 치고 왔다면 개판될 수도 있었다는 건 중요하지 않은 사실)했던 경험을 비추어서 당시 전투 사단으로 전개되어 있던 수도 사단과 9사단을 '한국전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한 부대라고 평가했습니다.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당시에 그가 본 수도사단이나 9사단(현리전...웁!!)의 상태와 두코전투, 백마 9호등에서 베트남내에 전과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전과를 내고 있던 두 전투사단의 모습은 하늘과 땅차이로 느껴졌겠죠.

 하지만 모든 미군들의 평가가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미국 선임장교들의평가는 전쟁이 길어질 수록 평가는 비판적으로 되었습니다. 특히나 초기에 도착한 수준 높은 한국군인들이 전쟁에서 갈수록 질적으로 떨어지는 군인들로 대체되었기 때문인데 당시 한국군의 질적인 면에 대해서 정확히 알만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회고록 몇개를 뒤져보면 자원 입대 비률도 많긴 했지만 나중에 되면 어떤 경우는 감방 대신에 월남행을 선택(대표적인 경우로 유명 야구 해설위원 중 하모씨)하거나 자원 입대에서도 강요(행보관님 크리)에 의한 입대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의지가 많이 약화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나 1967년 9사단 파병이후에 육군의 경우 철군 전해인 1971년까지 4만5천명 정도의 병력을 꾸준히 유지시켰던 것을 보면 병력보충을 위해 애를 먹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어느 전쟁이든 장기화 되면 될 수록 어느 군대고 질적으로 떨어지는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또한 전술적인 면에서의 평가도 제1야전군 사령관 콜린 중장의 경우 한국군은 너무나 과도하게 헬기와 지원을 요구하며 작전후에 너무나 장기간 동안 장차 작전에대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고 심지어 그는 한국군 2개 사단의 노력은 미군 1개 여단의 노력에 불과하다고 평가 하였습니다. 사실 한국군은 월남에서 미국을 뱃겨먹은(?) 관계로 미군을 제외한 동맹군들 중에서 가장 잘 먹는 축에 속한 군대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일 겁니다. 더군다나 장비, 물자 보급에 있어서도 상당한 양을 보급 받은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장차 작전에대한 평가나 사단의 역량에 문제에 관한 부분은 우리로써는 약간 억울한 평가라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분명 한국군 2개사단이 1번 국도를 따라서 길게 분포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전술 책임 구역 또한 두개 사단이 접촉한 이후에는 철수 전까지 전혀 바뀌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미군측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이었을 겁니다. 도무지 부대가 움직이지 않고 한지역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게릴라전에 대하는 한국군이 거의 독립적으로 거의 분권화된 작전수행을 했고 점령지역에 오랬동안 눌러 앉아 그 지역을 확실히 장악하려 했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분리 탐색 격멸' 작전의 특성상 한국전때 지리산 빨치산 부대 쫒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자생하는 게릴라를 소탕하는데 굳이 역량을 집중시켜 유연성을 떨어뜨릴 이유가 없다는 예기죠. 더군다나 파병 규모에서 미군처럼 대규모의 동원 능력이 없었던 한국군에게(군단급 작전이라도 10개 대대가 동원된 편제상으로 '군단급'이라고 말할 수 없었죠) 미군의 방식은 정치적으로든 전술적으로든 맞지 않았다는게 정답일 것 같습니다.

 

 

 민사작전에 대한 평가도 있는데 미군 민사작전개발 지원단의 평가는 한국군은 지역 안정화에는 탁월하였지만 베트남 지역군 강화나 정착촌의 퇴화를 막는 일은 관심이 없었으며 베트남군과의 협력과 관계 개선에는 미흡하였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한국군은 지역에대해서 지원은 많이 해주는데 자체적인 치안 능력 예를 들어 미군 같은 경우 민간비정규군과 같은 것을 설치하지 않아서 베트콩과 자생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낮다고 평가하는 것인데 사실 주월 한국군 편제를 보면 따로 사령부 예하에 민사작전 중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부서 활동은 사실상 심리전을 담당하였고 일반적인 민사작전은 사실상 주월한국군 예하 전 부대가 수행했습니다. 말그대로 전투부대도 곧 민사작전 부대이다 보니 또한 한국군의 작전기조에 입각해서 굳이 무리해서 그리고 주민들의 반발을 감수해가면서 기존의 군경을 대체하는 조직을 만들 이유는 없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월남군과의 협력 관계에 있어서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는게 사실입니다. 사실 월남이 망해버린 관계로 그에 관련된 자료가 없지만 72년 춘계 대공세때 방어를 위해 한국군 9사단 동원 문제가 제기 되었는데 월남 참모총장의 의해서 바로 기각된 것을 보면 의외로 월남군과의 사이가 좋지 못했던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럼 이만 허접한 글 마치겠습니다. 잘못 된 것들 마음 껏 지적 부탁드립니다.

 

 

출처: 전사연구

        한군인의 보고서 

        통계로 보는 파월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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