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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작전계획 15호,16호,그리고 17호: 프랑스의 공세주의

by 바스통 202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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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들 알고 있기를 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의 프랑스 군을 떠올리면 강력한 공세주의만을 강조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공세주의가 어떤 환경에서 생겨났고 당시 프랑스의 이전 작전 계획과 국제, 국내 정치적 상황, 그리고 프랑스 군부의 상황은 굉장히 쉽게 간과된다는 것이다. 흔히들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들을 접하다 보면 보불 전쟁 이래로 마치 프랑스가 근 30년 동안 독일에 대해서 굉장히 오랬동안 칼을 갈았던 것처럼 비춰지는 것은 물론이거나와, 마치 공세주의가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만들어진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사실 공세주의가 국가의 전략으로써 주창된 것은 1913년 전쟁이 터지기 약 1년 전의 일이었다는 구절은 찾아보기가 굉장히 힘들다. 더군다나 여기에 1차 모로코 사태에서 독일에 대한 군사 해법에 대해서 굉장한 반감을 들어내는 프랑스의 모습을 본다면 과연 프랑스가 정말 독일로 부터 군사적인 영광을 찾으려고 했는지 모호해진다. 몇년 동안의 이런 모순적인 일련의 행동들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선 1900년대를 전후한 프랑스의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

 

 1900년대의 프랑스는 드라퓌스 사건에 의해서 말그대로 난도질 당한 상태였다. 좌우로 갈라진 프랑스 내부의 직접 대결은 그 발원지인 프랑스 군부에서도 날아들었고 논란의 중심이 된 프랑스군의 사기는 말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특히나 귀족 출신 장교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가중되었는데 공화파 정부가 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한다는 생각에서 였다. 이는 보불 전쟁 이래로 제 3 공화국 하에서 민군관계와 군대의 존재 양식에 대해서 논쟁, 그리고 전문 군대에 대한 존속 여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었던 것과 관계가 깊다. 그리고 드라퓌스 사건의 후폭풍으로 공화파 정부는 강력히 군 개혁을 밀어붙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에 당연히 귀족파 장교들은 반발하며 단체로 사퇴하게 되며 이 자리를 공화파 장교들이 차지하게 되는 정치가 벌어진다. 이로 인해 군의 지위와 발언권이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뿐만 아니라 '민간 정부의 군대 길들이기'는 군 지휘 체계 또한 분권화 해버렸다. 프랑스 육군의 최고 직책은 참모총장과 최고 국방위원회1의 부위원장으로 분할 되어있었다. 즉 참모총장은 평시 군사 조직의 수장으로써의 역활만을 가지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은 전시 사령관으로써 평시에는 그저 기한 동안 작전 계획과 이와 관련된 동원계획이나 짜는 자리에 불과했다. 그외에 중요한 사안들 재정이라던지 무기 도입과 같은 부분은 민간인이 국방 장관이 가지게 되었다. 이는 드라퓌스 사건 이래로 불만이 고조된 군의 쿠데타 가능성을 없애고 문민 통제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프랑스군 참모총장의 지위는 최선임자가 아닌 중간 선임이 임명되었으며 그나마도 굉장히 불안하여 재임 기간이 평균적으로 2년에 지나지 않았다. 더 이상한 것은 그 위에 있는 국방부 장관은 더 많이 교체되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1900년의 첫 10년 당시 프랑스군의 상황은 정치적 문제에 의해서 난도질을 당한 상황이었다. 이는 강군의 이미지와는 전혀 상이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 여파로 인해 1905년에는 프랑스군의 복무기간이 3년에서 2년으로 줄어드는 초유의 사태도 벌어졌다.
 

 하지만 1904년을 기점으로 대외적인 환경이 급변하였다. 익히 알려진 대로 당시 영국과 독일은 해군 경쟁이 한창이었다. 영국은 독일의 건함 경쟁에 대한 대응으로 영국의 해군 개혁과 19세기까지의 전통적인 외교 즉 고립주의에 탈피하는 것으로 맞서게 된다. 이것은 곧 프랑스로써는 전통적인 적대 관계이면서 1898년 파쇼다 사건으로 대변되는 식민지 쟁탈전에서 실질적인 경쟁자였던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곧 영불 화친조약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 화친 조약의 체결이 곧 독일에 대한 대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직접적인 동맹으로써의 지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듬해 1차 모로코 사태는 프랑스로 하여금 영불을 갈라놓으려는 독일과 핵심 이익을 두고 충돌하게 되면서 생긴 긴장이 문제가 되었다.

 

 이런 국내외적 환경 변화 속에서 당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브뤼제르2에 의해서 작전 계획 15호가 작성된다. 이 계획에서 프랑스는 알자스 로렌지방을 거점으로 독일군이 정면에서 공격해들어올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가정하에 프랑스군은 국경 도시인 베르덩과 툴 그리고 에피날을 중심으로 독일군의 침공을 유도하여 격멸한 후 반격을 개시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소위 선방어-후공격 전략이었다. 이는 기존의 작전 계획 14호에서 탈피해 최초로 독일만을 유일한 적국으로 상정하고 짜여진 작전 계획이라는데에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보는 봐와 같이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지금에 와서 볼때에도 슐리펜 계획에서 말하는 벨기에를 우회하는 기동을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굉장한 허점을 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적은 이 계획이 작성된 당시에도 주요 비난의 대상이었다. 이를 테면 독일이 벨기에 국경도시까지 철도를 부설한다는 정보와 같은 내용의 군사적 가치는 무시 되었다. 이런 수정 요구 대열에는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팡드젝도 끼어있었다.3 말그대로 군 상층부는 이 문제로 굉장한 혼란 상황을 벌였다. 하지만 브뤼제르 장군은 수정요구를 거부하였다. 그의 논리상 만약 벨기에를 통해서 일부 독일군이 우회해 들어온다면 로렌지역의 독일군은 약화 될 것이고 때문에 프랑스 군의 반격 전환이 더욱 쉬워질 것이라고 보았다. 로렌 지방이 전적으로 독일군의 주요 공격 거점이라고 보았으며 설사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해 들어온다면 이는 적의 조공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수정 요구가 워낙 강하여 그는 마지못해 1906년 초에 2개 군단을 제5군으로 창설하여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국경지대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렌지방으로 독일군이 전면 공격을 할 것이라는 중점에는 아무 변화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에 부 위원장이 되는 아그롱 또한 비록 벨기에 국경과 베르됭 북쪽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하였으나 작전 계획 15호가 말하는 로렌지방에서의 방어와 반격이라는 명제는 여전히 충실히 따랐다.

 

 이는 프랑스군은 여전히 보불 전쟁의 결과로 파리와 베르됭 이남 국경 지역 방어에 여전히 강하게 집착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또한 빼앗긴 알자스 로렌지방을 되찾는 것은 장차전에서 최소한의 목표가 되었다. 결과적으론 프랑스군은 벨기에 국경지역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또 설사 독일군이 이 지역을 돌파하여 침공하더라도 그것은 조공이며 주공은 로렌지방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믿는 하나의 이유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1905년 이전까지 프랑스군은 본격적인 군비증강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편 1차 모로코 사태가 터지면서 프랑스군은 독일의 모험주의 외교에 그대로 노출 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프랑스군은 군비와 병력 상황을 재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내 1905년을 기준으로 했을때 독일군에 대한 프랑스군의 약세가 명확해졌다. 우선적으로 프랑스군은 59만명(새로운 복무기간을 적용하면 51만) 독일은 60만으로 근소한 차이의 현역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양국은 동일하게 동원 후 2주 이후에 본격적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 되었다. 하지만 독일은 개전과 동시에 26개 군단(평시 23개 현역 군단)을 운용하게 되어 프랑스의 현역 군단 수(21개 현역 군단)을 크게 초과 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독일군은 동원이 선포된다면 20개의 예비 사단, 약 10개 군단이 추가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은 전시에 21개 군단으로 36개 군단을 막아야 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게 될터 였다.4 더군다나 동맹이었던 러시아는 러일 전쟁에서 중립을 지킨 것에 대한 반발로 독일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 터진다면 사태를 관망할 것이 확실시 되었고 영국은 대륙에서의 전쟁은 고사하고 이제야 화친관계를 맺은 것뿐었으므로 군사 지원 의사 조차도 없었다. 이는 프랑스군에게 악몽같은 상황이었고 패배주의가 군 내부에 퍼졌다. 실제로 전쟁이 터졌다고 하더라도 독일군이 우세하게 전개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에 더해 작전계획 15호의 또 다른 맹점으로 독일군의 기습 공격에 대한 상정이 전혀 되지 않았다는 점 또한 문제가 되었다.

 

 물론 당시에 독일은 전쟁을 치룰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군사적 우세를 외교에서 활용할 마음은 있었다. 이는 프랑스의 반독 정권을 퇴진 시키고 독일이 제안한 국제회의 개최가 관철되는 상황을 초래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또한 프랑스 국내적으로 반독 의사가 높아졌고 프랑스 친독 정권은 결국 완고한 자세를 취할 것을 강요 받았으나 직접적으로 군사행동이나 전쟁 선포를 종용하는 목소리는 적었다. 결과적으로 볼때 독일이 전쟁의사가 없었으므로 사태 후반기는 독일의 군사적 우세와는 무관하게 독일의 외교적 패배로 막을 내렸지만 이는 주요국들 특히 프랑스와 영국에게 군사력을 증강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국 협상 체제가 본격적으로 틀을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단 중요한 점은 당시 주요국 내부에서 복지에 대한 요구로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군의 규모를 늘리기 보다는 장비를 현대화하고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으로 군비 증강이 이뤄졌다는 점 또한 당시의 둔화된 군비 증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군사적 문제점을 노출된 프랑스군 또한 15호 계획을 전폭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때문에 1907년에 최고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오른 라크루아는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게 된다. 그는 보불 전쟁 이후로 프랑스군의 작전 계획이 독일군의 새로운 전술적 전략적 변화에 따라가지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면서 베르됭과 벨기에 국경으로 독일군이 침공해 올 경우를 대비한 작전 계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때마침 화친조약으로 인해서 영국을 겨냥해 대서양 방면을 방어하고 있던 병력을 재배치할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서 2년 간의 구상을 거쳐서 1909년 공식적으로 작전계획 16호가 발표되었다. 

 

 16호는 15호와는 다르게 벨기에 국경 지역에 독일군이 나타날 가능성을 대비한 것이 특징이었다. 또한 15호와 마찬가지로 선방어-후공격 교리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격시에 예비군을 이용해 새로운 기동군을 창설하여 반격시에는 2배 이상의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 이런 예비군의 집결과 동원에 필요한 철도와 동원계획을 정비하였던 것도 16호 계획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15호 계획의 반발로 새워진 16호 계획도 보불전쟁의 영향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소위 슐리펜 계획에 혁신적인 대응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비록 벨기에 국경과 프랑스 북부에 대한 병력이 배치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장차 독일군이 침공할 규모에 비해 매우 소규모였다. 단지 '침공할' 가능성만을 염두하였을 뿐 '전면적인 주공일' 가능성은 배제하였던 것이다. 16호 계획상에서 상정되어 있는 베네룩스 지역을 통과할 독일군은 단지 2개 군 병력이었다. 게다가 이 독일군은 그대로 도버해안을 따라 파리로 '우회' 하는 것이 아닌 베르덩으로 남진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15호 계획에 비판적이었던 라크루아도 독일과 프랑스가 인접해있는 국경 지역에 10개 군단 4개 군을 배치하는 것에는 이의가 없었다. 이는 동시에 방어와 반격의 중점도 로렌지방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작전계획 17호가 아닌 16호가 슐리펜 계획과 격돌하였다면 초기 로렌 대공세와 같은 공세 없이 전력을 보존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벨기에 국경 지역 대한 약점을 노출하는 것은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병력 재배치등의 중점 변화에 따른 대규모 혼란은 차치하더라도 가용병력이 늘어난 프랑스군 입장에서는 그래도 나았을 것이라는 존 키건의 말은 틀린 것은 아니다.

 

 사실 프랑스군이 선방어-후공격 전략을 채택했던 것은 보불 전쟁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외교적인 부분5들을 포함해 프랑스군은 공격적인 행동이 보불 전쟁 패배의 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곧 그대로 군사 전략에 반영되어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방어 전투를 선행하도록 강요하였다. 여기에 프랑스군의 동원이 독일군의 동원보다 몇일 정도 늦을 것이라는 가정도 깔려있었다. 떄문에 보다 전문적인 현역군대가 예비군이 완전히 동원되어 배치 되기 전까지 위치를 사수해야 한다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 또한 고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동원에 대한 문제도 따지고 보면 보불 전쟁의 악몽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심한 군비 상황과 전쟁 준비 부족에 따른 군인들의 자신감 결여 또한 방어적인 전략의 한 부분으로 볼 수 도 있다. 이는 선술하였듯이 1차 모로코 사태 당시에 반독 여론과는 별개로 군대도 전쟁 준비가 되지 못했다고 정부에 보고할 정도였으므로 프랑스 군인들의 패배주의와 자존심의 상처는 컸다. 또한 군 또한 전쟁은 피하자는 입장에 있었다. 이는 곧 지지부진한 군비확장으로 나타났다. 심지어는 참모총장이 한심한 군비 상황에대해 항의하며 사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제3공화정 기간 동안 민군 의 위치 문제와 문민 통제 그리고 혼란스러운 프랑스 내의 정치 상황에 근본적인 원인으로 봐야 한다. 특히나 국방장관, 참모 총장, 최고 국방위원회 부 위원장으로 분리 된 지휘 체계는 불의의 쿠데타를 단념시키는 역활에는 확실했지만 전략에 알맞는 군비 건설을 저해하였고 효과적이고 균형에 맞는 무기와 이를 조달하기 위한 예산을 확보하고 조율하는 기능을 상실하도록 만들었다. 때문에 1차 모로코 사태 이후에도 분리 된 지휘권은 군비 확장이 지지부진한 한가지 이유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2차 모로코 사태가 벌어지면서 프랑스 정부의 대군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비록 2차 모로코 사태가 영국의 지원과 프랑스 국내의 강력한 여론으로 프랑스의 외교적 승리로 끝났지만 두 차례에 걸친 독일의 무력 외교는 프랑스로 하여금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특히나 만약 프랑스의 입장에서 독일의 무력에 지속적으로 노출 될 경우 크게는 양국 간의(그리고 프랑스가 열세인) 전쟁 작게는 독일로 부터 알자스-로렌 지방의 정당한 지배를 인정하라는 택일을 강요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이전까지 프랑스 내부 구성원들이 견지했던 '피할 수 있는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사태 이듬해부터 독일이 세계 정책을 버리고 중부 유럽에 집중하면서 프랑스로써는 독일의 위협에 노출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때문에 프랑스는 러시아의 군비 재건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프랑스군의 전문군대로써의 사기를 진착시키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런 시기에서 선방-후공 전략을 밀어내고 서서히 유명한 공세주의 전략이 지지하는 군사 이론가들이 늘어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공세주의의 효과성이나 대두 과정에 대한 부분 보다는 '왜 공세주의가 대두 되었는지' 이유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나 프랑스의 공세주의는 당시에 프랑스군이 가지고 있던 높은 정신력과 사기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은 사기와 패배주의 그리고 열세인 군비 상황에서 대두되었다는 점은 공세주의가 단순히 적극적인 공세만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즉 공세주의는 프랑스가 이전까지 견지했던 '안일한 평화주의'의 결과인 전력의 열세를 방어 전략보다는 적극적인 공세로써 만회해야 한다는 방법론의 변화일뿐 프랑스가 자체가 공세로 변화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정신력과 공격성의 강조는 자신감이라기 보다는 도리어 자신감의 부족을 나타내는 하나의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런 대내외적 상황에 따라서 정부는 군의 사기를 높여줄 요량으로 우선적으로 지휘체계를 손질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즉 1911년 군대 통제를 위해 이원화된 군 최고 지휘권을 참모총장직으로 통일시키고 미셸을 마지막으로 부위원장직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부위원장이 가지고 있던 전시 사령관과 전시 계획 및 동원 업무 수립 업무는 참모총장으로 넘어가 단일화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군의 참모총작직은 실질적으로 군대 내의 수장으로써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참모총장직에 조프르6가 앉게 되었다.

 

 조프르는 참모총장직에 앉자 마자 작전계획 16호가 가지고 있는 선방어-후공격 전략의 효과성을 의심하고 이를 대대적 수정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궁극적으로 이는 공세주의를 기반으로한 전략을 수립하는 첫 단추였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엔강 근처에 있던 5군을 벨기에 국경으로 북상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북아프리카에 있던 19군단 또한 벨기에 국경 근처에 배치시켰다. 이는 단순한 수정이 아닌 장차 새로운 작전 계획의 일부로써 활용될 터였다. 이를테면 독일군이 오기전에 먼저 벨기에 국경을 넘어버린다는 것과 같은 행위들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알자스 로렌 국경의 중요성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중점은 로렌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5군의 재배치 이후에 조프르는 21개월 동안의 전략 연구에 돌입한 끝에 작전 계획 17호를 제안하게 된다. 이 작전계획은 흔히 알려진 대로 필요한 병력 규모와 독일군의 공세 방향과 작전 그리고 성격, 이에 대응하는 프랑스 군의 전략을 담고 있었다. 17호에 의한 작전 배치를 보면 프랑스 군은 5개 군으로 이뤄져있으며 1~3군은 알자스 로렌 지방에 배치하고 5군은 벨기에와 룩셈브르크 국경지대에 배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후방에 배치된 4군은 기동군으로써 필요할 경우 공세를 가하는 3개 군을 지원하는게 주였으며 필요할 경우 5군을 지원하는 역활을 맡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군의 복무기간이 3년으로 다시 원상 복귀되자 프랑스군은 총 71만의 병력을 확보 할 수 있었고 1913년 10월에 무한 공세주의가 프랑스군의 정식 전략으로 선포되었다. 하지만 결국 17호을 들여다 보면 로렌지방이 중심이라는 관점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사실상 5군을 제외한 4개 군이 전쟁이 시작되면 알자스로렌 지방으로 공세에 투입되는 형국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17호 작전계획상 5군이 벨기에 국경을 넘지 않았는가 라는 점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우선적으로 공세주의의 성격은 예비 사단을 끌어모을 시간보다는 현역 사단을 빠르게 기동하여 적의 의표를 찌르는 전략이다. 따라서 이런 전략적 입장상 아무리 소수의 독일군이라도 벨기에를 침공한다면 당연히 공세주의의 연장에서 벨기에를 침공하여 독일군의 조공을 공격해야 할 것이었다. 최소한 군사적인 입장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만약 프랑스가 벨기에를 먼저 침공한다면? 이라는 가정을 했을때 외교적 계산이 복잡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의 대륙 간섭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실제로 조프르는 벨기에에서의 군사 작전에 대한 질의서를 프랑스 외무부에 전달하였지만 여기에 대한 답변은 당연히 불가였으며 영국은 프랑스의 벨기에의 선제 침공에 대해서 굉장히 강경한 자세로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래서 5군은 벨기에 국경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영국이 벨기에 침공을 묵과했다면 아마도 4~5군이 벨기에 국경으로 공격 방향을 두지 않았을지 예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이것을 '영국이 벨기에 선제 침공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좌익과 벨기에 국경 지대의 방비가 약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영국은 벨기에를 '공격'하지 말라고 했을뿐 국경 지역을 '방비'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굳이 따지자면 무조건 선제 공격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전략 사고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17호 계획의 약점 약점 특히나 프랑스군의 좌익이 비어있다는 맹점에 대해서는 프랑스 군 내부에서도 지적이 여러 번 있었다. 독일군이 측면 포위 공격을 할 것으로 예상함에도 도버 해협을 점하는 프랑스 군의 좌익은 완전히 비어 무방비 상태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한 보완책을 조프르에게 요구했지만 공세주의를 맹신하던 조프르는 이를 거절하였다. 

 

 

 

 

 

 

 

아 사고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snyder 개객기 말을 무슨 아오..........

  

 

  1. 보불 전쟁이 끝난 1872년 국방전략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최고 기구로써 창설 되었다. 이후 별 기능을 못하다가 1888년 부터 활성화되었다. 12명의 군단 사령관들로 구성되었고 최고 위원장에는 국방장관 맡았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전시 사령관이 되는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2. Henri Joseph Brugère (1841~1918) 프랑스의 장군
  3. 1904년 초에 프랑스군은 독일군으로 부터 슐리펜 계획과 거의 같은 구상의 우회 기동을 담은 작전계획에 관한 문서를 첩보를 통해 입수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작전 계획 수정 요구의 주요 근거로써 활용되었다고도 한다.
  4. 프랑스군은 1905년 당시 전시에 프랑스는 88만 독일군은 133만이 동원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5. 외교적인 부분에서도 프랑스의 무책임한 선전포고는 결과적으로 전쟁 준비와 외교적 고립은 물론이고 전쟁의 명분까지도 독일에게 넘겨버리는 상황을 자초하게 되었다.
  6. 여기에서도 프랑스 정부의 군대 통제와 두려음에 대한 면면을 볼 수 있다. 조프르가 전투 병력 지휘나 전략 구상 경험이 없이 참모총장직에 오른 이유는 군사전문성보다는 공화국 정부가 좋아할만한 정치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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