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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광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터의 변천사

by 바스통 2020.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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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동산백원, 아세아 여관

 

 1930년대 광저우는 홍콩과 프랑스령 베트남을 잇는 지리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제까지 중국 국제무역의 유일한 창구로써 누리던 무역항의 지위는 19세기 중반부터 성장한 상하이에게 그 지위를 서서히 빼앗기고 있었다. 특히나  실크라는 단일 수출 품목에 대한 절반 이상의 높은 의존도를 보였는데, 1929년의 경제 대공황의 영향으로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것이 실크 산업이었던 것을 양지한다면 광저우는 상하이 보다 훨씬 심대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양쯔강 유역을 배후지로 쌀을 생산한 상하이와는 다르게 광저우는 동남아시아를 배후지로 하여 쌀을 수입하는 입초성 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량의 이민 노동력을 화교로써 동남아시아에 방출하여, 동남아시아의 농업, 산업, 산업에 진출하였다. 그로 인해 동남아시에서 자리 잡은 화교들이 보내는 상당한 양의 화교 송금이 광저우로 흘러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1920년대에 매년 1억원 가량을 유입시키는 막대한 부였다.

 이는 당시 한적한 외곽지역이었지만 행정 중심지인 웨슈구와 가까웠던 동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산 대학과 근접한 지역이었던 이곳은 당시 비교적 부유한 사람들과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온 화교들의 별장과 외국에서 잠시 들른 사람들을 상대하는 여관업이 성행하고 있었다.

 현재 본 조사에서 한정하고 있는 동산백원(東山栢園)과 아시아 여관(亞細亞旅館) 또한 이러한 배경 하에서 설립되었던 것이다. 백원(栢園)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산백원(東山栢園)은 개인 별장이었고 임정요인들은 이 때문에 세를 주고 이 곳에 판공처를 차릴 수 있었다.

 

1960년대 동산구 동산 공원

 

 1949년 광저우에 공산군이 입성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1958에 동산 백원과 아세아 여관이 있던 곳은 동산 공원이라는 이름의 노인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1980년대까지의 중국에 대한 자료가 그렇듯 이 시기 동안의 동산백원과 아세아 여관이 어떻게, 왜 철거 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광저우 정부의 자료를 찾지 않는 이상 찾기 힘들다.

 하지만 공산 정권 설립 이후에 시행 된 오반운동이나 신 중국 건설 운동과 같은 반 자본적이고 반 외세적인 일렬의 개혁 조치들이 부유한 사람들의 별장들이 늘어서 있었던 거리를 어떻게 대했을 지에 대해서 예상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당시 동산공원은 노인공원이라는 이름답게 노인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나, 도시가 확장되고 시간이 갈수록 이용인구가 늘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동산공원이 2~5호까지 한 번에 들어선 것이 아닌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재개발 및 공터화

 

 1980년대에 도시가 확장하면서 텐허가 구()로 승격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동산구는 중심지인 웨슈와 대학들이 있는 구내를 제외한 동쪽은 텐허와 같이 여전히 교외 지역으로 대부분이 논밭이나 황무지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텐허구가 계획상업지구로 발전하고 지역중심상권으로 떠오르자, 자연스럽게 동산구는 텐허구와 웨슈구의 중간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구 도심의 상권이 분산 이동하였고 중심지로써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특히나 동산 공원의 맡은 편에 들어선 광저우 8대 대형 백화점 중 하나인 동산백화점과 광저우 지하철 1호선의 개통은 동산구를 웨슈구, 텐허구와 함께 하나의 거대한 상권으로 연결시켰다.

 그와 더불어서 전통적인 상업적 행정적 중심이었던 웨슈구가 계속 커짐에 따라서 2005년도에 행정 구역상에서 동산구 를 완전히 폐지하고 웨슈구에 흡수, 편입시키는 개편이 단행되었다.

 또한 텐허구 정부가 텐허구상업시설망발전장기계획(2007~2020)에 따라 가판과 농산물 등이 제한하고 프렌차이즈 업종, 고급 백화점, 브랜드 숍 등 고소득 화이트칼라를 타깃으로 하는 업종을 권장함에 따라 동산구 또한 지하철 역을 중심으로 쇼핑, 여가, 오락, 문화 시설 등의 상업시설들이 들어서고 도시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서 2011 1월을 전후하여 동산 공원이 폐쇄 되고 서진로 1호는 휴대통신기기 판매점으로 있었으며 2호에서 3호는 콘크리트로 포장된 공터가 되어 몇 그루의 나무와 지하철 환기시설이 지어졌다. 또한 5호는 유치원 시설이 되어있었으나 해당 지역을 탐방하였을 때 해당 유치원은 문을 닫은 상태라 방문할 수 없었다.

 현재 이 곳은 버스 종점과 동산구 지하철역 그리고 동산 백화점과 같은 각종 주변 쇼핑몰들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 지역으로 가는 유동인구는 매우 많으며 고른 연령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을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는 사람들은 교육기관이 들어서 있는 5호를 제외한다면 민족 의미론적 기능을 매우 약했다. 특히나 예전의 공원이 가지고 있던 휴식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몇몇 노인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나무 화단에 앉아 있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 버스를 기다리거나 폭염을 피해 앉아 10~20분가량 쉬다가 이 구역을 벗어나는 것이었을 뿐, 공원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던 특징적인 휴식처로의 공간적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단순히 교통 및 쇼핑 중심가에 있는 공터로써의 기능만을 가지고 있었다.

 도심 내의 동산공원이 가지고 있던 공원으로써의 기능은 해당 지역에서 300m정도 떨어진 곳에 동산일변공원이라는 이름의 공원을 지어 과거 동산공원이 가지고 있던 기능을 소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참고문헌

 

[1] 강정애, 광저우 이야기, 2010

[2]박근형, 중국 읽어주는 남자, 명진출판, 2010

[3] 강진아, 1930년대 중국의 중앙, 지방, 상인,

서울대학교출판부, 2010

[4] 알랭 루,20세기 중국사, 책과 함께, 2010

[5] 김주용외 4, 국외항일유적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6] 김구, 백범 일지, 돌베개, 2005

[7] 김홍원, 광저우시 주요 소비특징 및 상권,

신흥지역 연구센터, 2012

[8] 홍콩 및 중국의 주택정책과 도시 계획,

도시정책연구소, 2007

[9] 특별취재, 임정90주년 승리의 역사를 가다-1 5000리 역사투쟁(), 중도일보, 2009 410

[10] 김자동, 임정의 품안에서 28,

http://book.hani.co.kr/arti/SERIES/185/403799.html, 2010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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