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은 두가지의 고질적인 문제에 시달렸는데 하나는 제정적인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지원 인원의 부족이었다. 창설 당시에 12명의 장교로 시작한 광복군이지만 사실 광복군 총사령부는 2년내에 3개 사단 규모로 광복군을 확장 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인원 부족으로 결국 광복군 1,2,3,5 지대 밖에 편성 할 수 없었고 그나마도 인원 부족으로 재편성을 해야할 정도로 광복군의 인원 부족은 심각한 상태였다. 사실상 인적자원 대부분이 윤함구(국민당 정부는 45년까지 중국 지역을 윤함구, 대후방, 해방구로 구분했는데 윤함구는 일본군 점령지역, 대후방은 국민당 점령지역 해방구는 공산당 점령지역을 뜻한다.)에 들어가 있었고 한인 교포 대다수가 거주하는 화북지방은 중국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의 활동지역으로 광복군이 활동하기 위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광복군은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초모 공작 즉 적지에서 인원을 끌어들이는 공작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공작대의 조직과 활동
사실 이런 인적 자원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한 초모 공작은 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기 이전인 1939년 9월 부터 임시정부의 승인 아래 이루어졌다. 이들은 서안 방면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간편하게 서안 공작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적을 5지대의 서안 공작과는 큰 상관은 없다. 아무튼 이들은 조성환을 주임으로 군사특파원 6명을 임명하고 그 다음달부터 서안 방면으로 진출하여 초모공작을 벌였고 총사령부가 창설 된 이후에도 계속 활동하였고 최종적으로 1940년 11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동하면서 그 다음해 1월에 임정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인력과 물적 자원 미비로 그 성과는 매우 작았다.
한편 광복군 총사령부는 초모 공작의 임무를 첫째는 사병의 모집 둘째는 선전과 정보 수집 셋째는 적정정찰 마지막으로 필요시에 유격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강력하게 추진하게 된다. 이는 서안이라는 지역이 공작과 작전의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병력확보에도 유리한 지역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광복군 사령부는 각지대에 초모 공작대를 설치하고 각 지대장을 징모분처로 임명하여 병력 확보를 크게 독려한다. 다음은 각지대의 공작대와 활동 지역이다.
제1지대/ 노태준등 7명/ 산서성과 하남성 일대에서 활동
제2지대/나태섭등 4명/장가구, 하북성 일대에서 활동
제3지대/이복원등4명/안휘성, 강소, 산동성 일대에서 활동
제5지대/이하우등7명/북만주 일대에서 활동
제6지대/이지일등수명/강서, 남경 그리고 안경 일대에서 활동
이들은 각기 활동구역에서 사병 모집, 선전공작 및 적정 수집 그리고 수차례의 반정 공작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공작의 성과와 그 후
이들의 이러한 활동에도 뚜렷한 성과는 제 5지대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사태의 근본적인 이유는 임정 자체의 공작비용이 부족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임정은 중국의 원조금과 동포들의 군자금이나 매달 1500원의 애국 성금으로는 상당히 빠듯한 살림을 살고 있었다. 특히나 미국 지역의 두 한인 단체인 안창호(이미 오래전에 순국하였지만)계열의 연합회와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신나게 싸우던 시기라 임정의 재정난이 가중되는 시점이어서 충분하게 공작금을 지원할 수가 없었다,(쩝....) 또디른 이유는 중국군의 협조가 극히 미미했기 때문인데 다 아는 사실이지만 장제스와 국민당군은 광복 전까지 광복군에게 꼬장을 많이 피웠는데 이 부분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그래도 이러한 초모 공작으로 총사령부 창설 1년만에 광복군의 전력은 창설때보다 10배인 300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 대로 1~5지대(6지대는 제대로 편제도....)는 이후에 1지대와 2지대로 재편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김학규가 1942년에 3지대를 창설하고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2지대를 보충함에도 불구하고 1지대와 2지대의 정원은 277명이 미달되었고 3지대도 당시에 70명 내외의 유명무실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태평양 전쟁 개전과 함께 1942년 2월에 김학규를 단장으로 7명의 공작언을 안휘성으로 파견하여 징집과 선전 공작을 벌였지만 이미 대일 항전과 태평양전쟁이 전개되던 시점에서도 보다 싶이 규모면에서 광복군의 애초에 목표였던 정규전을 통한 대일 항전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같은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1943년 10월에 이청천, 김약산, 이복원등 3인은 '군사 정책에 관한 제안'이라는 제목의 제안서를 의정군에 제출하는데 전체 내용을 쓰기는 그렇기 때문에 주요 내용만 간추리자면 광복군의 병력 표준을 30만으로 정하고 이를 위해서 중국으로 부터의 탈피와 군자금 다원화를 추진하고 해외 한인 무장단체 즉 당시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연안파 조선의용군이나 간도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계열의 소규모 무장 단체들과의 연계를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중국으로의 부터의 자금 독립과 다변화는 꾸준히 진행되지만 한인 무장단체와의 연계는 사실 이상에 가까운 내용이었는데 이미 이들은 중국 공산당과 소련으로 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전후 한국의 정치 판도를 형성할 실력있는 세력으로 볼 수 있었던 만큼 비록 임정과 광복군의 한인에 대한 대표성에 대한 자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었으나 현실적으로 3대 세력의 통합이나 연계는 이상에 가까운 제안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악조건적 상황속에서도 김학규의 3지대의 경우 1944년 말에 50명의 한인을 모병하므로써 1945년 3월에 정식적으로 3지대로 승격되어는 등 전력은 꾸준히 보충되었다. 결과적으로 1945년 5월의 광복군의 전력은 1지대와 2지대 그리고 3지대를 주축으로 인도 캘카타에 있던 버마 공작대와 성도 훈련반을 포함하여 574명의 전력을 확보하였다. 초모 공작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일본군으로 부터 광복군을 모으기 위한 활동이면서 동시에 중국군으로 부터 광복군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이기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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