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조선을 보는 다이쇼 시대의 2가지 시선

바스통 2020. 8. 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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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쇼 시대가 정치적인 자유의 획득이라는 내부적인 민권운동으로 전개 되었다고 한다면 대외적으로 제국주의적인 측면의 극복에 대해서는 어느정도의 행위가 이루어졌는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이쇼 시대라는 미묘한 시대적 상황이 한국과 한국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그리고 민족 개조론과 같은 당시에 대두되어진 민족 문제들이 어떻게 기인되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좋은 잣대를 제공한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이쇼 일본에서의 조선 식민지에 대한 2개의 시선자 민본주의자, 일본 기독교계 관점을 기술 할까 한다.

 

 그 전에 앞서 유념해야 할 것은 당시에 조선에 대한 통치방식에 대한 일본의 언론계와 지식인들의 기본적인 입장은 강압적인 총독통치에 대한 함구와 침묵이었다. 이것은 저항적 의미가 아닌 기본적인 식민지 통치 방침에 대한 지배층과 지식층의 기본적인 인식의 일치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아사히 신문에서 조선에 대한 사설은 손으로 꼽아도 다섯 손가락에 넣을 정도였다는 것은 이를 매우 잘 반증하는 일이라고 하겠다.(중국 문제의 경우 매해 마다 거의 60개 이상의 사설이 실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대다수는 강경 반응이었다는 건 또다른 함정이다) 그러므로 통치방침에 대한 비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매우 적었다는 것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민권주의자의 시선

 

 당시에 호헌운동등을 벌리며 국내적으로 민권신장에 앞장서셨던 민권주의자들의 기본적인 방침은 '안으로는 입헌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라는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입헌주의는 국정을 안정시켜서 밖으로 나갈 '힘'을 확장할 수단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들의 조선에 대한 입장은 기본적으로 회유적인 동화론에 입각하였고 그들의 비판은 총독부의 특권자본 보호 정책과 헌병과 일본인들의 횡포 그리고 관료주의, 감독주의, 간섭주의에 집중되어있었다. 

 

 그러나 이는 기본적으로 대일본론에 입각한 것이었고 기본적으로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에 대한 의문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은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3.1 운동의 원인을 일본의 식민지배 자체에서 찾지 않고 천도교인등 소수의 조선인과 미국인등 외국인 선교사들이 선동해서 이루어진 '불미스러운' 사태로 정의했던 것은 어찌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때문에 조선 식민지 문제가 주목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때문에 탄생한 문화 통치를 이들은 적극적으로 환영하였다. 환영뿐만 아니라 문화통치를 '찬양'하거나 하루 빨리 조선인과 일본인의 평등대우를 실행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주문을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문제는 이들의 자치에 대한 주장과 지지는 민족 자결에 입각하지 않은 것이었고 때문에 문화 통치 실행 이후에는 문화 통치에 따르지 않는 소위 '불량선인'과 독립 운동에 대한 적개심과 공포감이 더욱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 운동을 일본과 조선 쌍방간의 사대주의적인 면에서 찾았는데 일본의 사대주의란 입구탈아 즉 서구에 고개 숙이고 아시아에서는 철권을 휘두르는 '비열 사상'이라고 규정하였고 조선의 사대주의란 서구가 선교사들을 이용해 일본에게서 조선을 떼어내려는 모략 특히나 미국의 모략이라고 정의하였다. 결과론 적으로 이들은 조선인 자체의 민족주의적인 독립 열망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백인들의 일본 약화에 더 무게를 두었고 때문에 이들에게는 독립 운동 탄압보다 더 급한 문제는 아시아 일대를 일본의 밑으로 들어오게 하여 서구 세력을 막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을 '정의와 인도'라고 인식했으며 조선을 일본 지배하에 두는 것은 지상명령이었다. 그냥 개소리다.

 

 문제는 이들이 말하는 '정의와 인도'에 대한 것이다. 물론 민권운동가들도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자각 하는 것이 곧 불량화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의 자각이란 민족적인 자각이 아닌 철저하게 개인의 자각으로 한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들이 말하는 '정의와 인도'는 민족 자결의 원칙을 철저히 배제한체 통치 정책의 변화와 개량에 의해서만 구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들의 입장에서 부분적으로 문화통치에 대한 비판(헌병 경찰등 고압적인 지배등)은 존재 할 수 있어도 기본적으로 통치 방식에는 절대 찬성이었으며 조선을 완전히 통치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수단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논지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일본 기독교계의 시선

 

 기본적으로 일본 기독교계 또한 식민지 초기에 침묵적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몇몇은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하였는데 특히나 어용 종교로 세를 불리던 교회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그러나 3.1 운동을 기점으로 소수나마 조선의 식민 통치에 비판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3.1 운동의 계획자 중 다수가 기독교 신자였다는 점과 제암리 학살 사건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발생된 사건이었다. 굳이 조선 예술에 경애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조선인 멸시에 비판적이었던 야나기 무네요시(유종렬씨)의 발언을 제외하더라도 3.1운동에 대한 유일의 일본어 기록인 <조선 소요지 순회일지>등이 작성되는 등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들은 문화통치기에도 일본 조합기독교회 조선 전도부가 독립운동을 억압하면서 전도를 강화하는 행위를 '비열한 개' 같은 짓이라고 비판하였고 제암리 사건을 국치로 규정하고 이에 침묵하는 재계와 언론을 비판하였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는 전적으로 조선 민족주의와 독립 의지를 시인하였는데 워싱턴이나 프랭클린을 언급하며 독립운동가를 불량선인으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런 인식은 소일본주의 즉 일본이 모든 영토적 야심을 포기하고 민족적 자유 평등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도 발전하였고 이들은 여명회를 조직하여 김우영등 독립운동가를 초대해 강연을 열거나 조선에 대한 문화통치에 대한 공격을 하였는데 이는 유일한 조선 정책 비판하는 대중 집회였다고 할 수 있다. '다수의 남녀 조선 학생들'의 '터질듯한 박수소리'가 일본 청중들의 갈채에 호응한 것이었다고 기록하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서 이들은 신인회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인 학생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또한 일본 정부의 탄압에 대해 독립운동가와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탄압에 대해 지원사격을 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에서 조선의 독립은 미래의 이상이지 당면 과제로써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이는 5.4 운동에 대한 이들의 입장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5.4 운동에 대해서는 공감을 표하지만 21개조에 대한 즉각 폐기와 산둥 반도 반환 등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비록 자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독립운동에 대해 공감하였지만 억압민족의 일원으로써 한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조선의 독립이란 다음 세대가 해야할 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는 피억압민족과 억압민족이라는 관계 사이에서 매우 고무적인 시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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