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2차대전 일본계 미국인과 442연대

바스통 2020. 7. 2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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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직후 미국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빠집니다. 영미전쟁 이후 근 130년만에 미국 본토가 공격을 당한 것이죠 미국 사회는 엄청난 분노 했고 그 분노는 당연히 재미 일본인에게 향했습니다. 일본인 가게들이 줄줄히 털렸고 재미 일본인들을 길거리에서 폭행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당시 12만 3천명 재미 일본인들에대한 미국인들의 시선은 다른 추축국 출신 이주자들에대한 시선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이것은 곧 1942년 2월 FDR은 대통령 명령 9066호에 서명하는데 소위 [적성 국민 격리법]이라는 요상한 법이 발효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법으로 재미 일본인들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와이오밍州와 아칸소州등에 설치된 강제수용소에 수용됩니다. 왜 미국에서 이런 법이 발생했을 까요? 이것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른바 우생학과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있는 '황인종이 미국을 망친다'는 황하론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첩자노릇을 할지 모른다는 지극히 스탈린적인 생각(스탈린이 조선인을 중앙아시아로 내몬 이유도 조선인들이 일본인 첩자 노릇을 해 연해주를 먹는데 도움을 줄수 있다는 것이었죠)이 합쳐지면서 이것이 진주만을 계기로 표면화된 것일 뿐이었죠. 이 법은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미국 역사상 최악의 인종차별적인 악법'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쪽바리 고 홈(?)'

                                

 

 그러나 이 법이 시행될수 없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하와이었습니다. 당시 하와이의 전체 인구의 37%가 일본인이었고 섬 자체가 하나의 수용소가 되어버린 셈이죠. 미국 정부는 일본군이 상륙했을 때 벌어질 소위 '최악의 사태'를 염려해 아예 일본인 청년 1400명을 징집해 독립부대로 미국 본토로 보내버립니다. 이 부대가 미육군 독립 100대대가 됩니다만 소속 연대도 사단도 없이 단지 육군에서 관리하는 '적국과 내통할만한 놈들'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독일, 이탈리아 등지의 유럽 추축국 국민들이 미군에 입대해 토종(이 있나?) 미국인들과 함께 자국 군대와 싸웠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태도였습니다. 사실 이들이 전투에 참전할 거라는 생각을 가진 미국인 장성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그러나 1943년 미국의 유럽(왠 유럽 하시겠지만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 미군이 상륙합니다 1943년)과 태평양의 싸움이 격화되면서 병력부족으로 100대대는 북아프리카 오란으로 이동명령을 받습니다. 허나 이미 북아프리카 전투가 거의 끝나가던 시점이라 딱히 할 일이 없던 100대대는 비전투임무가 맡겨졌는데 이것은 상당히 인종차별적인 처사였고 이것에 일본인 장병들과 미국인 장교들(중대장 이상은 전부 하와이 주방위군 차출의 백인이었습니다)이 반발했습니다. 가족들은 수용소에있고 국가는 충성을 요구하는데 증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죠. 이에 대대장 터너 중령은 이런 장병과 장교들의 요구를 전달했고 결국 미육군 34사단 133연대 예하로 배치되 이탈리아 나폴리 남쪽의 살레르노에 상륙해 로마로 북상합니다. 이때 이들을 맞이한 것은 몬테카시노의 푸른악마들이었고 상륙 후 전체 병력의 60%에 달하는 인명손실을 입었던 100대대는 이곳에 투입되어 2주동안 잔여병력의 90%를 잃은 심대한 타격을 입습니다 이 전투로 100대대는 퍼플하트(미국 전상기장) 대대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이 무렵 미국 본토에서는 역시 병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수용소에서도 모병이 이루어 졌는데 이 조치에 가장 열광했던 것은 바로 재미 일본인 자신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미군복을 입고 전쟁에 참여한 다는 것은 미국에대한 충성심을 입증하기위한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만큼 절박한 선택이었던 것 입니다. 이에 8000명의 일본인 2세들은 부모 형제의 환송을 받으며 수용소를 떠났고 이렇게 창설 된 것이 소위 이세(二世) 부대라고 불리는 442연대입니다. 이들은 이후 100대대가 있는 이탈리아로 가고 100대대와 합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100대대는 442연대 1대대로 편성됩니다. 이후 이들은 제 92사단의 최첨병으로 산악지대를 돌파하고 제노아와 토리노를 아우르는 북이탈리아 전투에서 극심한 피해와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후 이탈리아에서의 전투가(고딕 라인이 남아있지만...) 사실상 종결되자 남프랑스로 보내져 역시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가서 뒤져라' 연대 수훈 답게 이들의 평균 사상률은 315%로 부대원 한명이 평균적으로 3번 다쳤거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평균적인 미군 사상률에 3배 이상이었습니다. 그만큼 수훈도 많아서 9486개의 퍼플하트가 수여되었고 33개의 십자 수훈 훈장과 21개의 의회 명예 훈장(메달 오브 아너라고 하면 아실려나?)과 554개의 은성훈장 그리고 4000개의 동성 훈장이 수여되고 대통령 친필 감사장을 비롯해 총 10번의 부대 표창을 받음으로써 미육군 역사상 최고 수훈 부대로 손 꼽힙니다. 전쟁 이후 1946년 이 한많은 연대는 해체됩니다.

                           

 

     '가서 뒤져라'

 

 

 이 부대에서 가장 유명인사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 故 김영옥 예비역 대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인들은 해외에서 (기분 나쁘게도)일본인 취급을 받았고 때문에 442연대에서 한국인들이 복무했던 것으로 확인이 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하신 분(사실 442연대의 정신적 지주)이 김영옥 대령이십니다. 독립 운동가 김순권 선생의 아들인 김영옥 대령은 100대대의 소대장과 중대장을 맡으면서 눈부신 전공을 세웠고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는 최고 훈장을 수여했으며 프랑스 비브뤼에 전투와 비퐁텐트 지역(영화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아직도 이지역 주민들은 김영옥대령을 기억하고 있다는 후문)을 해방시킨 주역으로 손 꼽히고 있죠. 이후에 군을 잠시 떠났다가 1950년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재입대하여 미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 최초의 유색인종 대대장(미국 역사상 최초라고 하겠습니다 라일구가 나왔을때 왜 흑인이 없느냐고 난리가 난적이 있었는데 한국전 이전까지 인종을 부대 갈랐습니다)이 되어 싸웠으며 미국정부는 그에게 동성훈장과 은성훈장을 수여합니다. 또한 전쟁 고아들을 돌보고 72년 전역 이후 유색인종 인권 신장과 미국내 한인 신장에 힘썼고 특히나 99년 캘리포니아 주 주의회에서 '일본 위안부 결의안'이 상정되었을때 100대대 출신 지도층에 지지성명을 이끌어내기도 했고 2007년 미 상원의 '일본 위안부 결의안'을 상정했던 마이클 혼다 의원은 김대령을 자신의 '영혼의 스승'이라고 표현하며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2004년 미국 이민 100년을 맞아 선정한 7명의 ‘이민영웅’에 문대양 하와이대법원장, 야구선수 박찬호 등과 함께 뽑혔으며 2005년 12월 29일 돌아가십니다. 한국 정부는 2005년 그에게 최고 훈장인 태극 무공 훈장을 수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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