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초기 당시 병력 손실과 보충
한국전 개전과 동시에 밀리던 상황에서의 병력 손실과 그에 따른 병력 보충 현황에 대해서 글 써봅니다. 참고 자료 되셨으면 합니다.
사실 한국전 초기에 한국군은 병력 충원과 보급이라는 면에서 아주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기사 밑도 끝도 없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전시편제에 맞게 예비 전력이 동원 되어서 손실을 보충한다는건 꿈 같은 예기 일지도 모릅니다. 사실상 건군 이후에 최초의 예비군이었던 호국군이나 이후에 편성되어 리(里)까지 편제를 가지고 있었던 청년 방위대 또한 동시에 나가 떨어졌던데 다 동시에 병력과 전선이 유동적으로 움직이면서 1950년대 7월에 떨어진 제2 국민병 소집령과 영호남 지역 방위관구사령부 설치를 통한 징집 마저 시원치 않았습니다. 때문에 초기에 병력 충원은 상당수 자발적으로 지원 참전한 학도병과 의용군, 이전에 편성되었던 호국군, 청년 방위대 장교 사병들을 현역으로 편입 시키고 그래도 모지라는 인원은 어떤 식으로든 징집해서 끌어모았습니다.
한국군의 병력 손실과 이후에 병력 충원과정에 대해서 순차적으로 적어보자면 1950년 7월 1일 당시에 수원에 설치된 육본에서 집계 된 것에 따르면 당시 한국군 육군 병력은 원래 총병력의 50% 밖에 되지 않았은 것으로 집계 되었습니다. 즉 원래 전쟁 이전에 병력이었던 9만 8천명 중 전사, 낙오, 포로, 실종자가 총 4만 4천명이었고 그나마 중화기는 한강이북에 대부분 유기 되었고 소총 한자루 가지고 있으면 잘 가지고 다닌 것이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피해는 지속되어서 1950년 한해의 한국군 병력 손실은 총 8만7천3백1십2명으로 한국전쟁중 가장 큰 피해를 냈는데 북한의 기습적인 기동전과 이후에 진행된 한국군의 지연작전이 벌어지면서 생긴 손해 였습니다. 이에 반해서 동년의 보충병은 20만2천1백2십7명이 징집되었는데 초기 징집은 주로 가두 모집, 부대장이 인근 마을에 직접가서 인원에 대한 강제 징집 그리고 의용군과 학도병의 자원 입대였습니다. 특히나 전쟁 초기 1달 남짓동안 벌어진 부대별 징집은 이후에 낙동강 전선이 안정화 될때까지 꾸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사실상 중앙으로 부터의 병력 보충은 기대하기 힘들었다는 예기였습니다. 사실 중앙에서도 병력 보충을 위해 노력을 하긴 했습니다. 전쟁 초기 7월 8일에는 전남/북편성관구 사령부가 설치되고 12일에는 영남/경남편성관구사령부가 설치되었으며 17일에는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해서 4개 편성관구로 개편해서 효율적으로 병력을 충원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속적인 전선 이동으로 징집 인원이 지역적으로 계속 줄어들었고 예하 신편사단들이 계속 변동되다 보니 도리어 혼란만 부추길 뿐이었고 소기에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습니다.
정상적인 중앙으로 부터의 병력 충원이 이루어진 것은 7월 말에 낙동강 전성이 어느정도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쯤이었습니다. 덕분에 부대장에 의한 강제징집은 사라졌습니다만 가두 모집이나 가택 수색(!!!)을 통한 강제 징/소집은 계속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시기에 눈에 띈 것은 안정적인 병력 충원을 위한 노력이었는데 정부는 당시에 병사구사령부와 신병훈련소등을 설치하여 지속적으로 병력 충원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훈련소들은 대구에 1훈련소, 김해에 2훈련소, 구포에 3훈련소, 제주도에 5훈련소, 삼랑진에 6훈련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해에 7훈련소가 설치가 설치되면서 구체화 되었습니다. 설치 이후 각 훈련소들은 매일 연대규모인 3000명의 병력을 꾸준히 배출했는데 훈련소별로 틀리지만 대구의 1훈련소가 가장 많은 1000명의 병력을 배출했고 5훈련소가 750명 2,3훈련소에서 각각 500명씩 삼량진 훈련소에서 200명을 배출하였습니다. 어떻게 본다면 매우 놀라운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지속적인 병력 보충이 빠르게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은 7월 말부터 격화된 낙동강 전선에 대한 병력 소모가 심해진데다 반격과 공세로의 전환을 위해 30만의 군대가 필요할 것이라는 국방부의 판단하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 판단 자체는 정확했다고 볼 수 있지만 문제는 그에 걸 맞는 능력으로 일단 당시 징집지역이 경상도로 한정되었던데 다 병력 동원제도상의 모순성이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피난민들이 대규모로 몰려들다보니 병적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질리가 만무했고 곧 정상적인 징집이 어려웠기 때문이죠. 결국 가택 수색으로 강제 징집과 가두 모집이 당시로 보면 가장 최선책이었습니다. 이런 초기에 혼란 때문에 정부는 9월 반격 이후에 병사구 사령부를 설치해서 제2국민역을 등록시키고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