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사논고-로마를 보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작가 : 마키아벨리출판한길사
발매 : 2003.04.15.
로마사 논고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의 처음 열 권에 대한 마키아벨리가 쓴 논평서. 1913~19년에 씌어진 이 책은 로마 공화정이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 「로마사」첫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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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지금 말로 하면 소위 공화주의 뽕을 조금 심하게 맞은 사람이다. 뭐 그때 당시로는 혁명적인 사상이었지만 군주론이나 로마사 논고를 읽다보면 마키아벨리의 공화정 사랑이 거의 맹목적 믿음이라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게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초기 로마 공화정은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정말 환상적인 정신적 지주였다. 공화정을 통해서 대제국을 건설한 도시국가 로마 SPQR 그 경의로움에 마키아벨리가 떡밥을 안 물었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 아니겠는가?
초기 로마는 따지고 본다면 평민과 원로원, 자유민과 귀족,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팽창과 반목으로 성장하였다. 초기 도시 국가 로마가 전쟁을 통해서 얻은 부를 얻는 과정에서 당연한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자유민 계급은 절대적으로 로마의 전쟁 경제에 필요한 군사력을 제공하는 계급이었고 원로원 계급은 이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태생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에 원로원 계급은 전쟁을 통해 얻은 토지와 노예라는 부산물을 일정 부분 분배함으로써 자유민 계급에 대한 경제적 배려를 하였다. 즉 내적인 배려보다는 외적인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자유민들의 희생을 보상해주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를테면 베이 같은 도시를 공략한 후 그 영토를 공유지로 선포하고 분배해주는 등의 방식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은 곧 그 한계를 보이게 된다. 귀족은 귀족인지라 정복 전쟁이 지속 될 수록 그 혜택은 귀족들과 원로원의 몫이 커졌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 자유민들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게 되면서 원로원과 자유민들은 갈등을 겪게 되는데 이것이 진짜 공화정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 말로하면 시민 불복종 운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실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다. 성산 사건이나 리키니우스법, 호르텐시우스법은 민화와 호민관 그리고 자유민들의 권리를 대변하고 원로원을 견제하려는 그 독특한 공화정 시스템을 대변해주는 사건들이었다. 자유민들과의 갈등과 정치적 통해 원로원과 민회는 서로 간의 심각한 사회 대립 상황에서도 서로 간의 협력을 통해서 이를 무마하고 사회를 안정 시킬 수 있는 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초기 공화정은 대체적으로 자유민들과 평민들에게 그 정치적 권리를 양보함으로써 협력을 이끌어내고 공화정과 로마라는 체제를 안정시켰다.
여기까지 본다면 마키아벨리 말대로 공화정은 정말로 이상적인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자유민과 지배 계급이 서로 간의 갈등과 반목을 하면서 그 원동력으로 횡적으로 팽창된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에서 혹자는 갈등 속에서 피어나는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연장 선상에서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비판도 일견 합당한 면이 있다. 그리고 혹자는 작금 한국의 현실을 비춰 지금의 시민 계급의 불만과 갈등이 사회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하려고 하기도 할 것이다(과연 누굴까 아마 불평등이 경제 좋다는 분들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과연 그럴까?
따지고 본다면 공화정을 무너뜨린 것은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 로마 자유민과 공화정 그 스스로의 한계였다. 대농장이 출현하고 원로원 계급과 특정 지역 총독 그리고 군인들이 엄청난 부를 축척해가면서 그 반대 급부로 자유민들과 자영농들의 경제적 기반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의 빛나는 성공에 의해서 이뤄진 결과로써 이런 부의 편중을 막는데에는 결국 정치적인 힘도 무력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나 농지개혁이나 시민법 개혁이 원로원에 의해서 저지 된 것은 로마 시민의 그 정치적 자유가 기존 기득권층의 이권과 부딪쳤을때 비극적이라서 더욱 숭고한 두 형제의 말로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소수의 부의 편중, 개혁의 실패, 시민과 자유민 계급의 경제적 몰락은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근본적으론 로마 공화정 시스템에 무력화를 가져왔다. 군제가 흔들리면서 시민병의 전통이 사라지고 마리우스의 개혁에 의해서 직업군인이 생겨나고 긴 정복 전쟁기간 동안 이 직업 군인들은 군단을 사병과 같이 거느리게 되었다. 개혁의 실패와 그에 대한 파급으로 벌어진 민회와 원로원 간의 갈등은 결국 로마를 무주 공산으로 바꿔갔고 시민들은 영웅에게 열광하였으며 그 결과는 술라를 시작으로 200년동안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내전이었다. 이것을 단지 공화정의 마직막 숨통을 끊었다는 이유로 두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있을까? 또 과연 공화정 내부에서 확대되는 시민계급 간의 경제적 격차와 조장되는 갈등이 계속 공화정 안에서 소화 될 수 있을까?
결국 로마사 논고에서 말해주는 공화정의 흥망은 공화정과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꿔져야 하는지 갈등은 어떻게 조정되고 어떤 제도적 틀안에서 견제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실패하였을 경우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지금 한번 신문을 읽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