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전간기 및 2차대전 당시 소련의 공수부대 발전

바스통 2020. 7. 2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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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말 미국을 방문한 소련인들은 미국 내에 박람회와 카니발에서 낙하산 기구를 목격하고 이를 소련으로 가지고 오게 된다. 그리고 소련의 몇몇 대도시들에 몇개의 공수 타워가 설치되었고 소련 시민들에게 낙하산 클럽에 가입을 장려하거나 낙하산 강하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 우수 낙하산 강하자에게 군입대가 장려되었다. 1931년 8월, 소련군부는 강하 숙련자 24명을 소총과 경기관총으로 무장시켜 3대의 수송기에 태워 강하하는 것을 실험하였다. 그리고 한달 뒤 육군 기동훈련의 일환으로 11명의 공수부대원이 하나의 비행기에서 적 전선 뒤로 강하하여 적사령관을 잡고 적 사령부를 점령하는 시범을 보였다. 이는 그저 낙하산 부대의 이점 중 하나를 실험하는 것일 뿐이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공격하고 소련 남부 국경에서 군사적 위협이 증가하자 소련은 군현대화를 결정하였는데 이 결정의 일환으로 소련은 미국으로 부터 smith/irvin 낙하산1을 구매하고 제11소총 사단에서 공수 훈련 자원자들을 차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젊은 군입대자들 중에서 자원자들을 뽑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 소련은 2대의 4발 수송기에 분승한 46명의 공수부대원을 집단 강하시키는 기록을 달성하였다. 또한 이와 동시기에 대형 낙하산을 통한 경전차 낙하도 시현되었다.

 

 그리고 1935년 키에프 근처에서 열린 기동훈련에서 소련은 1200명에 달하는 연대급 인원의 집단 강하를 시현하였다. 여기에는 미국 영국 독일의 무관들이 참관하였다. 

 

 하지만 알려진 대로 2차대전 당시에 소련의 공수부대 운영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1943년 당시에 유일하게 두개 여단급 공수강하가 이뤄졌지만 부대는 말그대로 녹아버렸다. 비약한 무장과 조종사들의 실력 부족 그리고 적정 고도보다 높은 고도에서 강하가 이뤄졌기 때문에 말그대로 부대는 공중에서 흩뿌려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 이후로 소련 공수부대의 대전 중 대규모 집단 강하는 없었다.

 

 또한 1940년 베사라비아2 점령을 위해 증편된 2개 대대 2000명의 공수병들이 강하하여 주력 병력을 선도하였고 겨울 전쟁 당시에도 공수 사단의 투입이 시도 되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소규모 제대의 강하는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독일군 전선 뒤에서 사보타주나 파르티잔 활동을 조직하거나 주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기본적으로 소규모의 인원이 강하 이후에 민간인 복장을 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나 1941년의 스몰렌스크의 경우에는 한개 여단 규모의 인원이 강하하여 각자 파르티잔 활동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대전 전 소련의 공수 작전에 대한 관심에 비해 빈약한 집단 강하 실적은 우선적으로 소련의 수송기 부족을 들 수 있다. 미공수사단의 예를 봐도 집단 강하를 위해선 공수 작전만을 위한 집약적인 수송기의 운영은 필수적이나 소련은 대전 당시 다른 부분에 수송기 운영이 절실했으므로 집단 강하를 위한 충분한 수량의 수송기를 모으는 것이 힘들었다.3 또한 공수 강하를 위해 숙련된 조종사들이 부족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4 또한 공수 사단이 지상 전투를 위해 계속 투입되어 심하게 소모됨으로써 강하 경험이 있는 낙하산병이 부족해졌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전 말기로 갈 수록 차량화가 보편화 되면서 병력 수송이 용이해진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련의 공수 작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은 아니며 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소련 공수 사단에 대한 증강이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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