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2차 대전 일본군 위문단 활동과 조선인 동원

바스통 2021. 6. 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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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가 팽창하면서 일본군 규모도 급속히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30년대 일본은 군사 모험주의가 가열 되고 전시 동원 체제로 일본 사회 이행 되면서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주요 군사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중일 전쟁이 발발하는 1937년에 일본군 인력은 300,000명으로 증가 되었고, 1941년에는 51개 사단과 그 외에 다른 목적의 부대를 포함해 1,700,000 명으로 확대 된다. 이런 대규모 동원은 1938년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하여 가능했다. 이 법을 통해 일본은 인적 물적 자원을 일본 내에서 대규모로 동원 할 수 있었는데 이는 문화 예술 분야의 인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 법에 의해 일본은 일본 내의 음악인, 무용가, 예술가들에게 전시에 부과된 '문화정책'을 따르도록 강요받기 시작했다. 이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군부는 확보 된 예술인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일본군을 위한 위문단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즉 일본군 위문단은 민-군 협력에 따라 별도의 독립적인 위문단을 편성한 미국과는 다르게 동원 체제 하에서 어느 정도 강제적인 인적 자원 동원의 연장선에 있다. 이에 따라 일본인 가수와 배우 등 연애인은 물론 게이샤와 같은 인원들까지 동원되었고 이런 인적 자원 동원은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인들 또한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식민지 조선 또한 이런 일본 본토의 정책에 따라 일본군 위문단이 여럿 조직 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중일 전쟁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는 1937년을 기점으로 조선인 위문단 동원이 더욱 가속화 된다. 특히 당시 총독부 어용 친일 단체였던 조선군사후원연맹 산하에 운영되던 '(북지)황군위문단'이 대표적인 위문단이었다. 이 단체는 미국 등의 위문단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사기와 오락 거리 제공을 목표로 운영 되었다. 

 

 이들의 위문 공연 활동은 일반적으로 한 번에 10명에서 15명으로 공연 팀이 편성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만담, 노래 및 춤으로 구성된 라이브 공연을 수행했다고 한다. 좀 더 정확한 세부 활동으로는 현지 위문단 파견, 출전, 귀향 군인에 대한 송영, 접대, 물품 제공, 활동을 위한 기금 모금 등을 하여, 현지 위문 공연만 하던 미국 위문단 보다는 좀 더 규모가 큰 종합적인 조직으로 구성 되었다는 것은 눈 여겨 볼만 하다. 이러한 비대한 조직이 필요했던 이유는 이들의 공연이 단순히 일본군만을 위한 것이 아닌 조선인들을 상대로 한 프로파간다로써의 역활 또한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형 위문 단체의 출현과 더불어 당시 이광수, 임학수, 최승희를 포함한 당대 문화계 주요 친일 인사들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이런 거물 친일 문화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당대에는 일본군을 위한 크고 작은 위문단이 조직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북지)황군위문단'은 1941년에 '군인원호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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