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일본의 1차 대전 군사 활동

바스통 2021. 5. 21.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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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7월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미국, 중국과 같이 당초 중립을 선언하여 유럽의 전쟁을 관망하는 모양새를 취하였다. 하지만 유럽 강대국들이 유럽의 전쟁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던 차 때마침 1914년 8월 7일, 영국이 영-일 동맹에 근거하여 일본에 남중국해에서 활동하는 독일의 동양함대 순양함과 상선들을 일본 해군이 단속해 달라는 지원을 요청하였다. 

 

 분명 이것은 상선의 보호에 국한한 제한적인 요청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8월 8일 일본 내각은 전면적인 참전을 결의하였다. 이에 영국은 일본의 이권 확대를 우려하여 전면적 참전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내 영국 이권에 위협이 되는 동양 함대는 부담스러웠고 넘어가게 된다. 결국 최후통첩이 독일에 전달되고 8월 23일 일본은 개전을 선언하고 대독 선전포고 하였다.

 

 그 이후의 군사작전은 신속하였다. 선전 포고 직후 일본 해군을 동원하여 독일 남양 군도를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독일이 적도 인근에 가지고 있던 마리아나 제도, 마셜 제도 그리고 캐롤라인 제도가 동년 10월 일본에 완전 점령 되었다. 이 제도들은 1918년 일본의 위임 통치 하에 운영되었고 태평양 전쟁을 지나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은 동시에 칭다오를 공격하기 위해 선전포고 이전부터 일본군 18사단을 주축으로 1개 여단과 포병, 공병 전력을 증편하여 5만의 병력을 준비하였다. 이윽고 9월 1일 선발대를 필두로 9월 8일까지 증편 된 일본군 1차 상륙병력이 칭다오에 상륙하였다. 동시에 텐진 조차지에서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사우스웨일즈 국경수비 연대 2대대와 시크 연대 36대대 예하 2개 중대로 구성된 1500명이 남하하여 일본군과 합류하게 된다.

 

  반면 칭다오내 독일군 병력은 제3해군보병 대대를 주축으로 1개 포병 대대와 해군 수병 등 정규군 2700명과 방어를 위해 소집 된 예비군 일부를 포함하여 총 5천의 병력 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상 본국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조차 없는 상황에서 독일의 동양 함대는 8월 13일 일본이 해상 봉쇄가 있기 전에 서둘러 본국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해상 전력 또한 경순양함과 포함 몇 척으로 미약했다. 그나마 위안은 요새와 포대가 있다는 것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의 공격은 9월 18일 공병대와 포병 전력이 포함 된 2차 상륙군 1만 2천 명이 상륙하면서 본격화 되기 시작하였다. 2차 상륙군이 칭다오 시가 동쪽을 상륙하는 동안 일본 18사단과 영국군은 남하하여 칭다오 시가 외곽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19일 칭다오 시가지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독일군은 결국 요새로 퇴각하여 방어선을 구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9월 28일 영-일 연합군은 요새를 완전히 포위하였다. 이때 일본군의 일부 병력은 독일의 산둥 철도 관할권과 이권을 장악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지정한 교전 지역을 벗어나 산둥성 주변 지역을 점령해갔으며, 결국 10월 7일 산둥성의 성도 지난을 점령한다. 

 

 이후의 칭따오 요새를 포위한 일본군은 성급한 공격 대신 정찰과 보급에 신경 쓰며 장차 공격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러는 도중에도 독일군의 일부가 요새를 나와 반격하는 등의 소규모 교전은 계속 되었으며, 양 측 간의 포격 전 또한 매일 빈발하였다. 

 

 이렇게 한 달 가량의 포위 전은 10월 31일 일본 군이 총 공세를 개시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대구경 공성포를 포함한 142문의 포격을 시작으로 요새의 포대들이 완전히 무력화 되었다. 이윽고 기습을 통해 전방 진지들이 점령 되었고 일본군 비행기들의 공습도 진행 되었다.

 

 결국 11월 6일 독일 총독은 항복을 선언하고 요새 공방전은 막을 내린다. 이후 일본은 독일 조차지인 자오 저우만을 점령함으로써 독일이 칭따오에서 가지고 이권을 완전히 몰수한다. 이 공격으로 일본은 해군 병력 300여명과 지상군 병력 100여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게 된다. 독일군은 200여명이 전사하였으나 살아남은 군인들과 민간인 5천 명 가량이 포로가 된다. 

 

 이 칭따오에서의 군사 활동의 결과로 일본은 독일이 중국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이권을 그대로 계승하기를 원했다, 그 일환으로 점령한 칭따오 점령지에 11월 26일 수비군을 창성하고 사실상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였으며, 이듬해 1월에는 유명한 '21개조 요구'로 하여금 중국 내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라고 강요하였다. 이는 5.4운동 등 격렬한 반일 운동을 중국 내에 촉발 시키는 촉매제가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1921년 군축 협약 전까지 칭따오와 상둥성 일대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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