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전후 일본 탈아입구론의 한계
메이지 유신 이래로 일본은 제국으로 나가기 위한 거점으로 조선을 병합함으로써 대륙 진출이라는 숙원 성취와 서구 세력과 동등한 국제적 대우를 바랬으나 1차 대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서구와 동일한 대우나 만주로의 직접적인 진출은 요원하였다. 그러던 중 발생한 1차 세계 대전은 일본에겐 '천우'의 기회로 여겼고, 여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전하였다.
당초 후발주자로써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학습할 수 있는 이점을 적극적으로 습득하여 활용하였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1차 대전을 승전함으로써 제국주의 국가의 일원으로써 인정 받을 수 있었다. 이것으로 인해 식민지 조선의 독립은 묵살 되었으며, 중국의 위치는 더욱 불안정해지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탈아입구' 정책의 성공이었다.
1차 대전의 승전과 전후 질서는 일본에게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앞서 말한 대로 신흥 근대 국가에서 열강이 인정하는 세계 강대국이 되었고, 여기에 서구 제국 국가 중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 스스로도 그런 정체성을 자타가 공인하도록 적극 노력하였다. 대외적으로 평화와 국제주의를 대변하는 신 질서의 선도자를 자임(비록 한국인들의 눈에는 위선적이라고 보일지라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위해 당시 처음 만들어진 국제연맹에 적극적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전후 군축 조약에도 임하는 동기가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일본 국내의) 정당 정치와 민주주의 확대에 앞장서면서 내국인들에게 일본이 서구 제국 질서에 편승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의 아시아에서의 우월성을 확고히 했다는 것에 있다. 1차 대전의 결과로 일본은 식민지 조선 지배를 공고화 했음은 물론이고 이를 통해 만주와 나아가서는 대륙으로 나갈 수 있는 합법적인 발판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특히 1차 대전 당시 미국의 대일 정책을 봉쇄하고, 미국과 타협하였던 경험은 일본으로 하여금 아시아 내에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탈아입구의 결과는 일본으로 하여금 서구에 대한 동등성과 더불어 아시아에 대한 우위성을 획득했다. '국제 질서'와 '제국 질서'가 교묘하게 뒤섞인 이중적인 논리로 서구 제국 국가 일본은 현실에 부딪치면서 산산이 박살 나고 말았다. 애초에 중국에서 새로운 서구 제국인 일본이 가져갈 수 있는 이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은 차치해도 1차대전의 결과물로 독일로부터 얻은 만주와 내몽골에 대한 이권 또한 크게 불안정하였다. 특히 물러나긴 하였지만 당초 일본의 개입에 크게 반발하였던 미국은 칼을 갈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는 일본이 생각하고 있던 우월성에 대한 믿음에 크게 상처를 내게 되었다.
여기에 국제 연맹 내에 활동과 군축 협약도 일본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국제 연맹에서 인종문제를 제기했으나, 수용 되지 않았던 것은 일은 일본으로 하여금 서구에 대한 적대감을 증폭 시켰고 일본과 미국의 이민 마찰은 민간인들에게 반미주의를 강화시켰다. 여기에 더해 다이쇼 시대의 국내 정치 불안정은 일본이 가지고 있던 탈아입구와 서구 정책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으며, (일본이 지배하는) 아시아주의를 강화시켰다. 이런 아시아주의의 강화는 훗날 대동아공영권의 주창과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러지는 초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