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전후 영국의 대한(大韓)입장
2차 대전 이후, 영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 재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2차대전 승전국으로 미국과 같은 연합국으로 참전하였지만 이미 대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서부 유럽 전선에서 조차 미국과의 경제적 국제적 지위의 차이를 명확히 느낀 영국 정부로써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입장에서 미국의 정책에 모두 협력 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구 식민 제국의 위치에 있던 영국은 미국과 식민지에 대한 입장이 달랐으며, 동북아 지역과 한국에 대해서도 미국과의 이해관계가 완전 일치 되진 못했습니다.
미국은 2차 대전 전후 해방 된 구 식민지 지역들을 유엔의 관리 하에 승전국이 공동으로 신탁 통치를 한다는 정책을 입안하였습니다. 이는 넓은 유럽 식민지들은 미국 혼자만의 힘으로 관리할 수 없으며, 통치의 효율성과 비용을 최소화 하기 위한 방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특히 자신들의 과거 식민지들까지도 동일한 신탁 통치 안을 들이미는 미국의 입장에 반대하였습니다. 이런 반대의 연장 선상에서 종전 직전, 영국은 미국이 제안한 '한국에 대한 4개국(미,영,중,소) 공동 점령 안'에 대해 초기부터 부정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특히 영국은 포츠담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 한국에 대한 연합국 점령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 된 것이 없다고 반응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전후 일본 점령과 한국 주둔에 대한 준비를 하였는데 이런 상반된 태도는 전후 점령에 대해 연합국이 공동으로 분할 점령을 하여도 결국 미국에 주도권이 넘어가는 것을 견제하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 개최' 전에 영국에 '4개국 신탁 통치 안'에 대해서 제안하게 됩니다. 이는 익히 알려진 대로 한국이 자치 행정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연합국에 의한 신탁 통치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이 신탁 통치 안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소련과 중국이 이것을 수용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전후 복구와 그나마 남아있는 영국 식민지 통제를 위해 영국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호주를 대신 참여 시키는 방안을 고려하게 됩니다. 하지만 막상 모스크바의 회의 상에서는 미소 양국만 신탁 통치 문제에 대해 대화할 뿐 영국은 한 걸음 물러나 소극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물론 신탁 통치와 호주 군의 주둔은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1945년 이후에 영국의 대 한반도 입장은 말 그대로 갈지자 형태로 미국의 전반적인 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음에도 한반도에 대해서는 결국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과 한국에 대한 정책을 지지하였습니다. 이는 영국이 지정 학 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점령 기간 중 GHQ와 영국 점령군 간의 갈등처럼 미국이 정국을 주도적으로 가져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호주'라는 대리인을 내세우려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